▲ '블레스' OST를 맡은 한스 짐머 (사진제공: 네오위즈게임즈) |
독일 출신 작곡가, 한스 짐머는 영화 음악 거장으로 통한다. ‘다크나이트’ 3부작, ‘인셉션’, ‘인터스텔라’ 등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작품에 연달아 참여했으며, ‘맨 오브 스틸’,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 ‘캐리비안의 해적’ 등 120편에 가까운 영화의 음악을 맡았다. 이러한 그가 한국 온라인게임과 손을 잡았다. ‘블레스’의 OST 13곡을 그가 직접 맡아 만든 것이다. ‘아이온: 영원의 탑’의 양방언, ‘아키에이지’의 윤상, ‘라그나로크 2’의 칸노 요코 등 음악거장과 손을 잡은 온라인게임은 많다. 그러나 거장과의 만남이 꼭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라그나로크 2’의 경우 칸노 요코가 만든 OST는 떴으나, 정작 게임은 참패를 면치 못했다. |
다시 말해 거장의 이름만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결과물을 만들어냈느냐가 성패를 가른다. 그렇다면 한스 짐머가 만든 ‘블레스’의 OST는 어떤 음악일까? 본인에게 직접 듣지는 못했으나, 네오위즈블레스스튜디오 천경호 사운드 디렉터의 설명에 따라 과정을 재구성할 수 있었다.
▲ 한스 짐머와 협업한 네오위즈블레스스튜디오 천경호 사운드 디렉터
(사진제공: 네오위즈게임즈)
많은 사람이 합주하는 오케스트라, MMORPG와 본질적으로 통한다
한스 짐머가 ‘블레스’ OST 제작 제의를 받은 것은 2011년이다. 당시 그는 ‘맨 오브 스틸’, ‘인터스텔라’ 등 SF 영화 음악 제작에 한창이었다. 이러한 그에게 MMORPG는 색다른 프로젝트로 다가왔다. 가장 주목한 점은 MMORPG가 가진 확장성이다. ‘콜 오브 듀티: 모던 워페어 2’, ‘크라이시스 2’, 등 기존에도 게임 음악을 만들어본 경험이 있으나 MMORPG는 본인이 알던 것보다 더 방대한 이야기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한국 영화와 손을 잡아본 경험이 없는 한스 짐머가 한국 게임 ‘블레스’ OST를 만들자고 결심한 이유도 MMORPG의 서사 가능성을 높이 평가한 것에서 비롯됐다.
‘블레스’ 제작진은 한스 짐머에게 ‘정통 클래식’으로 OST를 만들어주기를 바랐다. ‘정통 MMORPG의 귀환’을 목표로 삼은 만큼 전자음을 최대한 배제하고 악기 본연의 음색을 살려낸 클래식을 원했다. ‘맨 오브 스틸’ 등 직전에 작업하던 음악과 전혀 다른 분위기를 제의 받은 한스 짐머는 제작진과의 오랜 회의를 통해 뜻을 모으는 시간을 가졌다. 패권을 두고 겨루는 두 진영, ‘하이란’과 ‘우니온’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에는 남북이 대치 중인 한국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같은 세상에 살지만 다른 개성과 목적을 지닌 진영, 그리고 그에 속한 종족을 묶을 코드가 필요했다.
그 코드가 오케스트라를 활용한 클래식이었다. 오케스트라의 장점은 여러 악기가 모여 음악 하나를 이루기 특정 소리를 강조하거나, 축소하며 다양한 분위기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 음악 안에서도 선율이나 연주법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변주가 가능하다. 한스 짐머와 ‘블레스’ 제작진이 메인 테마와 두 진영, 종족 OST 13곡을 모두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클래식으로 만들자고 결정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같은 코드에서 전혀 다른 특색을 뽑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 '블레스' OST 오케스트라 실연 녹음 현장(사진제공: 네오위즈게임즈)
▲ '블레스' OST 메이킹 영상 (영상제공: 네오위즈게임즈)
우선 메인 테마는 서정적이면서도 두 진영의 대치 상황을 긴장감 있게 풀어냈다. 이어서 ‘하이란’과 ‘우니온’은 각기 다른 점을 내세웠다. ‘하이란’은 풍요롭지만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이미지에 초점을 맞췄다. 반대로 ‘우니온’은 어둡고, 억압받는 느낌을 강조했다. 종족은 진영 특징에 필요한 부분을 강조해 개성을 넣었다. 예를 들어 ‘우니온’에 속한 ‘핀테라’는 빈곤한 상황에서도 전투 성향을 잃지 않았다. 이 점을 감안해 리듬 섹션을 강하게 주어 역동적인 느낌이 나도록 했다.
여기에 오케스트라는 MMORPG와 본질적으로 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특정 악기가 혼자 튀지 않고 제 역할에 충실해 음악을 만들어내는 오케스트라와 같이 MMORPG에는 여러 유저가 공통의 목표를 이뤄낸다는 가치가 살아 있다는 것이 한스 짐머의 의견이었다.
천경호 디렉터는 “한스 짐머는 OST 외에 배경음악에도 많은 아이디어를 줬다. 예를 들어 파티 플레이에서 탱커, 딜러, 힐러 등 각기 다른 포지션이 참여할 때마다 하나씩 음악을 쌓아나가는 식으로 전투 배경음악을 만들어보자는 제안이 있었다. 정말 기발한 발상이라 생각했으나 실제로 작업을 해보니 PC 퍼포먼스에 무리를 주는 부분이 있어 실행으로 옮기지는 못했다”라고 언급했다.
▲ '블레스' 메인 테마 뮤직비디오 (영상제공: 네오위즈게임즈)
▲ 한스 짐머가 '블레스로 오스카상을 받아 보자'는 염원을 담아 제작진에 보낸 트로피
(사진제공: 네오위즈게임즈)
전투 몰입도를 해치지 않는다, 오케스트라의 또 다른 장점
천경호 사운드 디렉터는 악기 간 조화를 중시하는 오케스트라는 소리 하나가 튀지 않기 때문에 대사나 효과음도 자연스럽게 녹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블레스’는 공성전 등 여러 유저의 전투 효과음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상황이 많기 때문에 기본 분위기를 전하면서도, 효과음을 방해하지 않는 음악이 필요했다. 크지 않은 소리로도 악기 자체가 가진 울림을 활용해 분위기를 전달하는 오케스트라만큼 ‘블레스’에 어울리는 음악은 없다는 확신이 섰다.
▲ 악기 울림 하나하나가 녹음되도록 설계된 영국 에어 스튜디오 (사진제공: 네오위즈게임즈)
이러한 완급조절은 게임 곳곳에 들어갔다. 필드 전투나 공성전은 ‘폭풍전야’와 같이 고요하면서도 긴장감을 고조하는 음악을 배경으로 삼는다. 던전의 경우 테마에 맞는 BGM을 만들고, 전투 양상에 따라 고요에서 격렬까지 세 단계로 강도를 주어 진행 상황을 귀로 체감할 수 있게 했다.
여기에 ‘스토리 변곡점’을 소리로 알려주는 세밀함까지 반영됐다. 광폭화된 몬스터를 잡는 미션의 경우 전투와 동시에 음산한 음악을 넣고, 사냥에 성공하면 평화로운 음악을 넣어 사건이 전환되었음을 알리는 식이다. 스토리텔링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성우 녹음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현재까지 성우 83명이 동원됐으며, 대사 분량은 A4 기준 400페이지로, 웬만한 장편소설 2권 분량이다.
▲ 장편소설 2권에 달하는 '블레스' 대본 (사진제공: 네오위즈게임즈)
▲ 사운드 작업 현장 (사진제공: 네오위즈게임즈)
그렇다면 유저들이 가장 많이 들을 ‘타격음’은 어떻게 제작됐을까? 천경호 디렉터는 ‘사실성’에 초점을 맞췄다고 말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검으로 몬스터를 베는 효과음을 만든다고 가정해보자. 먼저 실제로 칼로 뭔가를 베는 소리를 녹음한다. 여기에 토마토를 으깨는 소리 등을 입혀 피로 이뤄진 생물을 베었다는 느낌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실제 소리에 느낌을 더해줄 또 다른 소리를 입혀 사실적인 타격음을 완성하는 것이다. 천 디렉터는 “생생한 소리를 위해 숲으로 새 소리를 녹음하러 가거나, 하수구를 찾아가 음산한 물 소리를 녹음해온 적도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녹음된 효과음만 20만 종 이상이다”라고 말했다.
▲ 다양한 도구를 활용한 실제 소리를 직접 녹음했다 (사진제공: 네오위즈게임즈)
▲ 현장감을 살리기 위한 외부 녹음도 진행됐다 (사진제공: 네오위즈게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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