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기사 > 전체

[장르열전] 성인 게임과 오타쿠라는 편견을 넘어, 연애 시뮬레이션

/ 1
게임이 문화의 한 축을 담당한 지 이미 오래지만, 아직도 일부에서는 게임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낯선 것에 대한 무지는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오해와 혐오를 낳는 것처럼, 게임 문화에 대한 낮은 이해도로 게임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게임에 대해 나름대로 해박한 사람도, 연애 시뮬레이션에 대해서 만큼은 유독 편견을 가지는 경우가 있다. 많은 이들이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을 선정적인 성인용 게임, 혹은 이해하기 힘든 오타쿠 문화와 동일시한다. 물론 과거 사례나 일부 게임만을 보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러한 비판 대부분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의 좁은 시각에서 나온 오해인 경우가 많다.

만약 당신이 아직 연애 시뮬레이션에 대해 좋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이제 그 색안경을 한 번 벗어보는 것은 어떨까? 게임에 대한 편견을 버리면 그 안에 숨겨진 진면목이 보이듯이, 연애 시뮬레이션 역시 생각처럼 가벼운 장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연애라는 인류의 근본적인 감정을 컴퓨터 세계에서 풀어낸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의 발전사를 되짚어보자.

* 본 연재는 NHN과 제휴로 네이버캐스트 [게임대백과]에 함께 게재됩니다.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미소녀가 등장하는 게임들을 통틀어 미연시(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라고 부르는데, 엄밀히 따지자면 연애 시뮬레이션과 연애 어드벤처 게임, 비주얼 노벨, 미소녀 게임은 각각 의미가 다르다. 먼저 미소녀 게임은 장르에 관계없이 아리따운 소녀가 등장하는 게임을 뜻한다. 다시 말해 RPG나 액션, 어드벤처, TCG 등 어디에도 붙일 수 있는 단어다. 연애 어드벤처 게임은 대사와 선택지 등을 통해 연애를 진행하는 게임이며, 비주얼 노벨은 분기 요소가 거의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된다.


▲ 연애 시뮬레이션과 연애 어드벤처, 비주얼 노벨은 각기 다른 장르다
사진은 비주얼 노벨 게임 '투하트'

그렇다면, 연애 시뮬레이션은 어떤 게임을 뜻할까? 과거에는 스토리에 따라 연애를 진행하되, 단순히 선택지를 고르는 것을 넘어 각종 연애 상황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수치(파라메터)를 관리하며 즐기는 게임을 말했다. 이러한 수치에는 연애 상대와의 호감도, 플레이어 캐릭터의 매력이나 체력, 외모, 직업 등이 존재하며, 자기 관리 및 이벤트, 특정 대화나 행동 등을 통해 수치 증감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야기의 분기와 최종 엔딩이 결정되는 장르를 연애 시뮬레이션이라고 불렀다.

사실, 위에서 언급한 특징을 시스템적으로 분류하자면 시뮬레이션이라기 보다는 연애 어드벤처 게임에 육성 시뮬레이션 방식이 결합된 장르다. 물론 플레이어의 개입 정도가 한정된 연애 어드벤처나 비주얼 노벨에 비해 해당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간다는 느낌이 크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실제 연애 보다는 만화적 색채가 짙은 시나리오를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 이로 인해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은 수많은 시뮬레이션 하위 장르 중에서 가장 현실과 동떨어진 게임으로 손꼽혀 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연애 시뮬레이션의 개념이 조금씩 바뀌어가는 추세다. 연애 어드벤처 게임에 시뮬레이션 요소를 접붙인 게임이 아니라, 현실 속 교제 상대 같은 존재를 가상 세계에 구현시켜 현실에서 느낄 수 있는 알콩달콩한 연애 감정을 자극하는 것. 한 마디로 시뮬레이션의 본질에 초점을 맞춘 게임이 조금씩 등장하고 있다.

80년대, 미소녀 게임과 에로 게임 등장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의 본고장은 일본이다. 일본은 전 세계 연애 게임(시뮬레이션, 어드벤처 및 비주얼 노벨) 생산 및 소비의 90% 이상을 차지하며 세계적 트렌드를 선도하는 시장이다.

일본은 컴퓨터 게임이라는 산업이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애니메이션과 만화 강국이었다.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아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애니메이션과 만화를 즐기는 것이 일상화 되었다. 이러한 문화는 초창기 일본 게임들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자스(Zarth, 1984)’나 ‘몽환전사 바리스(1986)’, 등의 초기 JRPG나 액션 게임을 보면 흡사 만화에서 갓 나온 듯 한 캐릭터 원화를 볼 수 있다. 특히 게임의 주요 구매층인 남성 게이머의 취향을 반영한 미소녀 그림체가 강조되었는데, 시대적으로 심의 체계가 느슨했기 때문에 꽤나 수위가 높은 이미지도 흔히 볼 수 있었다.


▲ 1980년대, 일본 게임업계에 미소녀 문화가 유입되었다. 사진은 1984년작 '자스'
(사진출처: tape-load.blog.so-net.ne.jp)

이러한 미소녀 게임 문화를 가장 발 빠르게 받아들인 장르는 바로 성인을 대상으로 한 에로 게임이다. 1982년 코에이에서 제작한 일본 최초의 에로 게임 ‘나이트 라이프(사실상 게임이라기 보다는 부부생활 지침서에 가깝다)’를 시작으로, 일본에서는 에로 게임 붐이 일어났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는 스퀘어, 에닉스, 팔콤 등 일본을 대표하는 유명 게임 개발사들도 앞다투어 에로 게임 제작에 뛰어들 정도였다. 이러한 에로 게임에 미소녀는 필수적인 존재였다. 미소녀 게임, 이른바 갸루게(Girl Game)라는 호칭도 이 때 생겨났다.

1980년대 출시된 미소녀 에로 게임의 대부분은 조작을 최소화하고 비주얼 요소를 강조하기 위해, 선택지를 통한 장소 이동 및 분기점 선택이 이루어지는 어드벤처 게임 형태를 띄었다. 훗날 이러한 형태의 게임을 통틀어 연애 어드벤처 게임으로 분류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게임성보다는 선정적인 이미지 보여주기에 초점을 맞춘 경우가 많았다. 당시 세태로 인해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미소녀 게임=에로 게임’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게임성 면에서 차별화를 두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 중에서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의 초석을 다졌다고 평가 받는 작품이 바로 ‘천사들의 오후(1985)’다.

‘천사들의 오후’는 연애 어드벤처 형태를 띤 에로 게임이었지만, 게임 진행에 있어 단순한 문항 선택에서 벗어나 히로인을 관찰하고, 대화하고, 행동하는 시스템을 구현해 능동적 플레이를 유도했다. 이벤트 역시 이러한 관찰-대화-행동 과정을 거쳐야만 발생하기 때문에, 내가 실제로 게임에 관여한다는 느낌을 준다. 이는 게임 속 히로인과 연애를 즐기는 과정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춘 최초의 시도로, 비록 시뮬레이션적 요소가 부족하긴 하지만 연애 시뮬레이션의 토대를 마련한 작품 중 하나로 평가된다.


▲ 일본 최초의 에로 게임이라 불리는 '나이트 라이프' (사진출처: koei.wikia.com)


▲ 연애 시뮬레이션의 개념적 시발점 '천사들의 오후' 시리즈 (사진출처: egames.dza2.com)

연애 시뮬레이션 장르의 대두

‘천사들의 오후’ 등을 통해 아지랑이처럼 대두되던 연애 시뮬레이션 장르는 ‘동급생’과 ‘두근두근 메모리얼’이라는 두 작품을 거치면서 구체화된다. 1992년 발매된 '동급생'은 이성을 만나고 관계를 발전시키는 과정에 시뮬레이션적 요소를 적용했다. 게임 속에는 10명이 넘는 히로인이 등장하며, 각자의 직업이나 성향에 따라 등장하는 시간과 장소가 각기 다르다. 또한 주인공의 행동에 따라 각 히로인과의 호감도가 변화하며, 이에 따라 볼 수 있는 대화나 이벤트가 바뀐다. 인터페이스 역시 정통 어드벤처 게임처럼 화면 이곳 저곳을 클릭하는 조사 시스템을 채택해, 플레이어의 능동적 개입을 극대화했다.

이와 함께, ‘동급생’은 선정성이라는 굴레를 벗어 던지고 게임성을 강조한 최초의 연애 게임이기도 하다. 밝은 분위기의 학교와 마을을, 타케이 마사키의 미려한 원화와 16색 컬러의 한계를 뛰어넘은 극한의 2D 도트 일러스트, 모든 취향을 만족시키는 다양한 매력의 여성 캐릭터, 그녀들에게 각각 부여된 개별 스토리 등은 여성이나 아이들도 관심을 가질 만한 매력적인 요소였다.

이러한 점에 힘입어 '동급생'은 선정적 요소가 게임의 진정한 장점을 가린다는 평가를 받으며, 선정적 장면을 들어낸 전연령판을 출시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일본 미소녀 게임 사상 최초로 1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거침없이 시리즈를 전개해 나갔다. ‘동급생’은 국내에도 아마추어 번역 팀을 통해 널리 알려졌으며, 이는 일본 미소녀 게임이 본격적으로 한국에 전파되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 연애 시뮬레이션의 토대를 마련한 '동급생' (사진출처: amazon.co.jp)

'동급생'이 포문을 연 연애 게임의 발전은, 1994년 '두근두근 메모리얼'에서 비로소 정형화된다. '두근두근 메모리얼'은 '프린세스 메이커' 등을 통해 당시 유행을 타던 육성 시뮬레이션의 관리 시스템을 본격적으로 도입했다. 기본은 '동급생'과 비슷한 학원 청춘 스토리로 잡았지만, 3년이라는 학교 생활 기간 동안 주인공을 어떻게 육성하는가에 따라 히로인들과의 관계 및 호감도, 이벤트 발생 유무 등이 변화했다.

마치 ‘프린세스 메이커’의 연애 버전을 보는 것 같은 게임성, 압도적인 게임 분량, 남성들의 순정을 저격하는 캐릭터 등을 통해 '두근두근 메모리얼'은 미소녀 게임 최초로 1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더불어 캐릭터 콜라보레이션으로 다양한 관련 상품을 만들어내는 원 소스 멀티 유즈 사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해 수백억 엔의 파생 매출을 이끌어 냄으로써, 코나미가 일본을 대표하는 메이저 개발사로 자리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두근두근 메모리얼’이 만든 또 하나의 재미있는 현상은, 연애 시뮬레이션이라는 명칭을 공식으로 사용함으로써 해당 장르명을 정립시켰다는 점이다. (참고로 코나미는 연애 시뮬레이션이라는 말을 상표로 등록했으며, 이로 인해 일본에서는 연애 시뮬레이션이라는 장르명 대신 연애 게임 등의 명칭을 사용한다.)

사실 '두근두근 메모리얼'이 선보인 연애 시뮬레이션 시스템은 엄밀히 따지면 '동급생'이나 '프린세스 메이커' 시리즈에서 선보인 시스템의 발전형이었으나, 연애 어드벤처와 연애 시뮬레이션의 구분점을 확실히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특히 ‘동급생’의 선례를 거름 삼아 선정적 장면을 배제한 전연령판으로 출시되었기에, 이전까지 에로 게임과 동일시되던 연애 게임에 대한 소비자들의 인식을 바꾸는 전환점이 되기도 했다.


▲ 연애 시뮬레이션이라는 장르를 구체화시킨 '두근두근 메모리얼'
(사진출처: otakei.otakuma.net)

‘두근두근 메모리얼’의 대성공으로 1990년대 중후반, 미소녀 게임 업계에는 호황이 찾아왔다. 하루가 멀다 하고 수많은 미소녀 게임이 PC와 콘솔 플랫폼으로 쏟아져 나왔고, 소비자층도 대폭 늘어났다. 그러나, 정작 재미를 본 장르는 연애 시뮬레이션 보다는 연애 어드벤처 게임이었다. 개발사 역시 캐릭터와 원화, 스토리만으로도 게임이 만들어지는 연애 어드벤처 장르를 선호했다. 이러한 장르는 프로그래밍이나 밸런스 조절 등이 최소화되기 때문에, 소규모 개발사들이나 비게임사들도 손쉽게 뛰어들 수 있었다.

‘동급생’과 ‘두근두근 메모리얼’ 후속작을 제외하면, 당시 출시된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중에서는 ‘룸메이트(1997)’와 ‘센티멘탈 그래피티(1998)’ 정도를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위 게임들의 결과는 썩 좋지 못했다. ‘센티멘탈 그래피티’는 발매 전 ‘두근두근 메모리얼’의 아성을 뛰어넘을 야심작으로 손꼽혔으나, 게임성 면에서 혹평을 받으며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뒀다. ‘룸메이트’ 경우 세가 새턴 내장 시계와 연동해 실시간 이벤트라는 독특한 시스템을 선보였으나, 막상 연애 시뮬레이션의 주 목적인 연애 요소가 없다시피 해 소비자들의 외면을 샀다.


▲ 실시간 이벤트 시스템을 도입한 '룸메이트'
(사진출처: homepage2-s-kitagawa.la.coocan.jp)


▲ 1998년 출시된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센티멘탈 그래피티' (사진출처: amazon.co.jp)

한편, ‘동급생’과 ‘두근두근 메모리얼’ 등의 세례를 받은 한국에서도 PC 패키지 게임시장 성장에 따라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 제작되었다. 남일소프트에서 제작한 대학 연애 시뮬레이션 ‘캠퍼스 러브 스토리(1997)’의 경우, 일본이 아닌 한국 사회를 배경으로 당시 대학생들의 생생한 캠퍼스 생활과 연애사를 세세하게 그려내 호평을 받았다.

오픈마인드월드에서 제작한 ‘리플레이’는 비디오 촬영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건을 주제로 한 청춘 이야기를 다뤘다. 단발에 그친 ‘캠퍼스 러브 스토리’와 달리 ‘리플레이’ 시리즈는 5편까지 시리즈를 거듭하며 상당히 오랜 기간 국산 연애시뮬레이션의 계보를 이어 갔다.

정통 연애 시뮬레이션을 표방한 위 게임들과 달리, 다소 독특한 작품도 출시되었다. 시드나인에서 출시한 ‘토막: 지구를 지켜라’는 여신의 목 위 부분만을 화분에 놓고 키우며 교감하는 충격적인 비주얼로 화제를 모았다. 전체적인 모습만 놓고 보면 화분 위에 놓인 한 명의 여신을 관리하는 육성 시뮬레이션에 가깝지만, 여신 외에 공략 가능한 다양한 여성이 존재하고, 게임의 전체적 주제가 사랑이라는 점에서 아슬아슬하게 연애 시뮬레이션에도 속하는 게임이다. 콘솔 진출 및 해외 수출 등 나름 인기를 누리긴 했지만, 게임성보다는 독특함이 화제가 되어 아쉬운 작품이기도 하다.


▲ 국산 연애 시뮬레이션의 서막을 알린 '캠퍼스 러브 스토리'
(사진출처: pann.news.nate.com)


▲ 충격적인 비주얼로 눈길을 끈 육성/연애 시뮬레이션 '토막: 지구를 지켜라'

정체되어 있던 연애 시뮬레이션의 혁명

사실, ‘동급생’과 ‘두근두근 메모리얼’ 이후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은 장르적 발전이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캐릭터와 원화, 스토리의 변화뿐, 시스템적으로는 90년대 초중반에 머물러 있었다. 플랫폼이나 기술적 발전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드림캐스트 몰락 이후에는 대부분의 미소녀 게임이 규제가 자유로운 PC 시장으로 이동했으며, 장르적 특성상 3D 적용의 이점이 크지 않았기에 비주얼적 변화도 거의 없었다.

미소녀 게임 전반에서는 ‘투하트’, ‘쓰르라미 울 적에’,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와 같이 스토리와 캐릭터, 원화, 애니메이션 등에서 화제를 모은 비주얼 노벨 장르가 원 소스 멀티 유즈 정책을 통해 주류 장르로 떠올랐으며, 일루전이나 티타임 등 성인 게임 업체는 3D 폴리곤을 본격적으로 활용하면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그런 시대적 흐름 속에서, 연애 시뮬레이션은 과거의 유물로 잊혀져 갔다.


▲ 2000년대에는 연애 시뮬레이션보다 비주얼 노벨 장르가 인기를 끌었다
사진은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 (사진출처: fanpop.com)

그러던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에 생각지도 못했던 혁명이 일어났다. 첫 번째 혁명은 바로 연애 시뮬레이션의 명가 코나미에서 2009년 출시한 휴대용 연애 시뮬레이션 ‘러브 플러스’다.

‘러브 플러스’는 게이머가 고등학생이 되어 3명의 히로인 중 한 명과 친해져 고백을 받고, 연애를 즐기는 게임이다. 게임은 고백을 받고 난 후 연애 과정 자체에 초점을 맞춘 리얼 모드에 들어가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는데, 데이트 중 스킨쉽, 키스 등 다양한 상황이 매일같이 바뀌어 연출되며, 시간과 계절도 반영된다. 여주인공 역시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3D 그래픽을 채용해 실시간으로 움직이며 플레이어의 행동(터치펜)에 반응한다. 이러한 이벤트는 현실 시간으로 2년 분량으로, 그 후에는 이벤트가 루프되기 때문에 엔딩 없이 계속해서 즐길 수 있다.

시스템적인 원류를 찾자면 실시간 연애 게임이라는 점에서 위에서 잠깐 언급한 새가 새턴용 ‘룸메이트’와 비슷하다. 그러나, 연애 요소를 대폭 강화하고 언제 어디서나 플레이가 가능한 휴대용 게임 플랫폼 NDS을 선택했다는 점이 신의 한 수로 작용했다. 이로 인해 ‘러브 플러스’는 역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중에서 현실에 가장 근접한 게임이라는 평가를 듣는 작품 중 하나다.

이 밖에도 엔딩을 향한 공략이 아니라 한 명의 여성 히로인만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즐길 수 있다는 점, 방대한 분량을 고품질 풀 보이스로 채운 점, 원화가 미노 타로의 미려한 일러스트, 선배-동급생-후배, 활발-새침-누님 스타일 등 전방위를 아우르는 캐릭터 설정 등은 가히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이로 인한 독특한 일화도 많다. 일본에서는 ‘러브 플러스’ 의 캐릭터 중 한 명과 실제 결혼식을 올린 남성이 등장하기도 했으며, 지방 도시에서는 캐릭터를 활용한 관광 상품이 생기며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켰다. 한편에서는 '러브 플러스'에 과몰입하는 사람들로 인한 사고나 시민 불편을 막기 위해 공공장소 '러브 플러스' 플레이 금지령까지 내려졌다. 그야말로 사회적 신드롬이었다.


▲ 연애 시뮬레이션의 혁명을 가져온 '러브 플러스'

이와 함께 2010년을 전후로 스마트폰 게임시장이 확대되면서, 휴대용 연애 시뮬레이션 시장도 조금씩 개척되었다. 2000년대 초반 이후 거의 사장되다시피 했던 국내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시장 역시 스마트폰에서 부활했다. 다만, 스마트폰 연애 게임 대부분은 연애 어드벤처나 비주얼 노벨, 혹은 다마고치 방식의 가상 여자친구 관리 게임인 경우가 많았다.

후자의 사례로는 바코드 값을 캐릭터로 변환한 ‘바코드 그녀’, 12지 캐릭터를 이용한 ‘아이엔젤’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게임들은 스마트폰 특유의 다양한 기능을 활용했다는 점은 독특하지만, 꾸미기와 소셜 커뮤니티 외에는 연애 관련 요소가 부족하다는 점이 한계로 작용해 일정 정도 이상으로 붐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 바코드 인식을 통해 여자친구를 생성-수집하는 독특한 설정으로 인기를 끈 ‘바코드 그녀’

연애 시뮬레이션의 두 번째 혁명은 스마트폰이 아니라 가상현실(VR)에서 일어나려 하고 있다. 연애 시뮬레이션은 현재 VR 게임의 새로운 지평을 열 게임으로 평가 받는데, 이를 가장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반다이남코에서 공개한 프로젝트 모피어스용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섬머 레슨(Summer Lesson)’이다.

‘섬머 레슨’은 2015년 현재 한창 개발 중인 작품으로, 게임의 세부 내용에 대해 알려진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나, 가상 공간에서 여성 캐릭터와 단 둘이 마주 앉아 눈빛을 교환하고, 대화를 나누고, 사용자의 고개 움직임에 따라 실시간으로 반응하는 여성 캐릭터의 생생한 모습은 그야말로 단 둘이 시간을 보내는 연인의 모습을 가상 현실 속에 그대로 옮겨 놓은 느낌을 준다. 이것만으로도 ‘섬머 레슨’은 무늬만 시뮬레이션이었던 연애 시뮬레이션 장르를 진정한 시뮬레이션 하위 장르로 거듭나게 하리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


▲ 프로젝트 모피어스로 개발 중인 신개념 연애 시뮬레이션 '섬머 레슨'
(사진출처: gematsu.com)

가상현실 연애시뮬레이션 게임이 넘어야 할 가장 큰 장애물은 역시 선정성 문제다.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 에로 게임 태생이라는 초반의 낙인을 지우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이미 3D 캐릭터와의 실시간 상호 작용을 바탕으로 한 작품은 ‘리얼 그녀’ 등의 에로 게임에서 선보여진 바 있기에, 자칫 잘못하면 ‘VR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가상 성행위 게임’ 이라는 낙인이 찍히기 십상이다.

VR 세계에서 열릴 새로운 단계의 연애 시뮬레이션이 이러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초기 시장 질서 확립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다. 연애 시뮬레이션 제작사뿐 아니라 VR 업계 전체의 자정적 노력이 뒷받침된다면, 새로운 세상에서 전개될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은 건전하면서도 색다른 느낌의 메이저 장르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공유해 주세요
게임잡지
2006년 8월호
2006년 7월호
2005년 8월호
2004년 10월호
2004년 4월호
게임일정
2024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