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에 출시된 원신이 국내에서도 두각을 드러냈고, 이후 블루 아카이브, 우마무스메 등이 연이어 흥행하며 모바일게임 시장에 서브컬쳐가 새로운 테마로 떠올랐다. 작년 하반기부터 서브컬처 테마를 앞세운 신작 출시가 늘었고, 이 중에는 바다 건너 한국 상륙을 준비 중인 게임도 적지 않다. 작년 2월에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일본에 먼저 데뷔한 헤븐 번즈 레드도 그 중 하나다.
이 게임은 어나더에덴으로 국내에도 알려진 라이트 플라이어 스튜디오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개발사로 유명한 Key사가 합작했다. 특히 에어, 클라나드 등 뭇 게이머를 울렸던 감동적인 이야기를 전했던 마에다 준이 15년 만에 선보인 신작이며, 아틀리에 시리즈, 벽람항로에 참여한 일러스트레이터 유겐이 캐릭터 디자인과 메인 비주얼 디렉팅을 맡아 화제를 모았다.
헤븐 번즈 레드는 우마무스메를 제치고 일본 애플 매출 1위를 차지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고, 올해 상반기에 국내에 출시된다. 이에 앞서 18일부터 25일까지 국내 유저를 대상으로 미리 게임을 선보이는 선행 플레이를 진행해 이를 통해 게임을 체험해볼 수 있었다. 기존 모바일게임에서 보기 어려웠던 밀도 있는 스토리로 자칫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는 모바일 전략 RPG에 차별화를 꾀한 것이 이 게임의 가장 큰 강점이다.
“하루만 더”를 외치게 하는 비주얼 노벨풍 스토리
예전에 문명이 인기를 끌던 시절에 ‘한 턴만 더’가 일종의 밈처럼 떠돌았다. 너무 재미있어서 ‘한 턴만 더 하고 자자’를 반복하다가 날을 꼴딱 세게 된다는 사연이다. 이를 헤븐 번즈 레드에 빗대어 이야기하자면 “하루만 더”를 외치다가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간다. 스토리 진행 방식은 학교를 배경으로 진행되는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나 비주얼 노벨과 비슷하다. 크게 하루 단위로 나눠서 전개되며, 오전, 점심, 오후, 저녁, 심야 단위로 플레이 파트가 나뉜다. 보통 오후에는 전투 콘텐츠를 소화하고, 다른 시간에 캐릭터와 대화하며 스토리를 풀어나간다.
배경 스토리는 간결하다. 어느 날, 우주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인 캔서가 지구로 추락했고, 기존 무기로는 당해낼 수 없어 인류는 멸망 직전에 몰렸다. 이 와중 특수한 무기인 세라프가 개발됐고, 이를 다룰 수 있는 소녀로 군대를 결성하며 인류생존을 위한 전쟁이 진행된다. 세계관은 무겁지만 전반적인 스토리가 심각하게 흘러가지는 않는다. 주축은 주인공인 카야모리 루카가 소속된 제31A부대이며, 이 외에도 여러 부대가 있다. 주요 대목마다 주인공 부대가 다른 부대와 얽히면서 각 인물이 지닌 사연을 조명한다.
주인공은 능글맞은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여러 소녀와 얽히면서 같이 점심을 먹고, 부대에 오기 전에는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알아가며 친해지는 시간을 갖는다. 그 과정에서 대사를 통해 각 캐릭터가 지닌 성격과 매력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특히 한국어 번역도 사투리를 제대로 살렸고, 사회에서 오래 격리되어 예전 유행어를 쓰는 캐릭터 대사를 국내 인터넷 초창기에 쓰던 ‘삼체’로 풀어내는 식으로 현지화해 국내 게이머도 스토리적인 묘미를 제대로 맛볼 수 있다.
주인공 부대를 포함해 작중에 등장하는 소녀에게는 기구한 사연이 있다. 국내 출시 전이기에 자세한 이야기를 풀어낼 수는 없지만, 나이에 맞지 않는 보스와 부하 놀이를 하며 노는 소녀 콤비가 단순히 철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점, 한 분야에 특출난 재능을 지닌 소녀들이 모인 가운데 너무나 평범한 능력을 지닌 소녀가 자리한 점 등은 밝은 배경과 묘한 대비를 이룬다. 아울러 여러 인물을 둘러싼 의문이 조금씩 풀리며 다음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을 자극한다.
큰 줄기는 소녀부대의 성장기지만, 그 안에 여러 군상을 부대 단위로 나눠 조명하며 캐릭터 하나하나에 집중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특히, 스토리 내 모든 대사가 음성을 지원하며, 비주얼 노벨처럼 선택지를 두고 무엇을 골랐느냐에 따라 분기가 나뉘며, 등장인물 반응, 답변, 이후 전개 등이 달라진다. 아울러 캐릭터 개별로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는 교류 스토리도 있으며, 과거로 돌아가서 다른 선택지를 골라 그 내용을 볼 수 있기에 게임에 담긴 모든 내용을 확인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처럼 밀도 있는 스토리텔링을 핵심으로 앞세운 게임이라 일반적인 모바일게임에 비해 초반 전개 속도는 다소 더디게 느껴진다. 다만, 헤븐 번즈 레드는 멀티 요소가 없는 100% 싱글 플레이 게임이기에 전개 속도를 플레이어가 조절할 수 있다. 다른 유저에 뒤쳐진다는 느낌 없이 본인 흐름과 호흡에 맞춰서 즐기면 되기에 속도에 대한 부담감이 덜한 편이다.
두뇌 풀가동, 까다롭지만 밀도 높은 전투
헤븐 번즈 레드는 앞서 이야기한 스토리와 이번에 살펴볼 전투까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투 부분은 예상보다 상당히 난이도가 높은 편이며, 권장 전투력에 맞춰서 진행할 경우 보스전 기준으로 10분 이상을 집중해서 수동으로 진행해줘야 겨우 넘어갈 정도로 만만치 않다. 손이 바쁘지는 않다. 모든 전투는 턴제로 진행되는데 턴이 돌아올 때마다 상황에 맞춰 캐릭터 배치를 바꿔주고, 여러 스킬 중 적정한 것을 선택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 길어지게 된다.
가장 큰 이유는 캐릭터 하나만 사망해도 게임 오버가 되어 전투를 이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전투에 출격하는 캐릭터는 6종이며, 전방에서 전투하는 3명, 후방에 대기하는 3명을 세워둘 수 있다. 각 캐릭터는 일종의 실드와 비슷한 DP와 실질적인 체력이라 할 수 있는 HP가 있다. 그런데 DP가 소진된 캐릭터는 한 방만 맞아도 사망할 정도로 취약한 상태가 되며, 방어막이 깨진 캐릭터의 DP를 회복시키는 스킬은 SS등급의 특정 캐릭터 단 하나만 가지고 있기에 범용적인 전술은 아니다.
아울러 전반적인 플레이는 던전 등 특정 스테이지에 입장하면 DP, HP, SP(스킬 포인트) 등을 지속적으로 유지한 채로 전투를 여러 번 이어가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전 전투에 DP가 깨져버린 캐릭터는 이후에도 어그로를 끌어주는 캐릭터가 있거나, 적 공격 없이 한 번 더 공격하는 보너스 턴 개념의 오버드라이브를 가동할 수 있는 특수한 조건이 아니고서는 가용할 수 없는 화력이 되어버린다. 대비 없이 전방에 꺼내놓다가는 바로 사망하며 소득 없이 전투가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즉, DP를 최대한 유지하면서 스테이지 끝까지 모든 캐릭터를 안정적으로 운용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를 위해 전방과 후방 캐릭터를 적절하게 위치를 바꿔주고, DP 회복 스킬을 언제 사용할지, 적 공격을 받지 않는 오버드라이브를 언제 발동시킬지 등을 매 턴이 돌아올 때마다 고심하게 된다. 이번 턴에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공략 성공 여부가 갈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캐릭터를 기용하는 과정에서도 무기와 역할을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같은 딜러여도 세부적인 역할은 3종류로 나뉜다. 적 DP를 깎는데 최적화된 브레이커, DP를 파괴한 후 많은 차수로 파괴율을 높이는데 특화된 블래스터, DP가 깨진 적의 HP를 소진시키는데 탁월한 어태커가 있다. 아울러 회복이나 버프 외에 기본적인 공격 스킬은 전방에 왼쪽에 배치해둔 캐릭터부터 사용하기 때문에 적 상태에 맞춰서 지속적으로 캐릭터 위치를 바꿔주는 플레이가 요구된다.
아울러 무기 역시 검이나 낫처럼 베는데 특화된 참, 총과 같은 원거리 무기가 주를 이루는 돌, 방패와 같은 무거운 무기가 속한 타로 구분된다. 스테이지에는 여러 속성을 지닌 적이 등장하며, 적이 지닌 상성에 따라 강한 무기와 약한 무기가 각기 다르다. 앞에 설명한 부분과 종합해서 보면 아군의 DP를 보존하면서도, 적 DP와 속성에 맞춰 캐릭터 스킬과 배치를 신중하게 진행해야 한다.
HP와 DP로 나뉜 체력, 캐릭터별로 나뉘는 역할과 속성에 따라 달라지는 양상 등 전투 중 관리해야 하는 부분이 다양하기 때문에 턴제 전략 RPG를 해보지 않은 유저라면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다만, 전투 중 캐릭터들이 대사를 통해 ‘이 무기는 잘 통하지 않는 것 같다’, ‘이번 공격은 좋았다’와 같은 힌트를 지속적으로 던져주며, 규칙 자체는 명확하기 때문에 침착하게 진행하면 이후 상황을 예측해가며 조금씩 돌파하는 묘미를 맛볼 수 있다.
아울러, 극초반을 넘어가면 일종의 연습모드라 할 수 있는 아레나, 액세서리 등을 획득할 수 있는 시계탑과 던전, 보스를 상대하며 많은 경험치를 얻을 수 있는 프리즘 배틀까지 캐릭터 성장에 특화된 콘텐츠가 개방된다. 특히 아레나는 첫 판을 진행하면 이후에는 저전력 모드로 장시간 손을 대지 않아도 되는 완전 자동으로 진행할 수 있기에, 직접 플레이하기 어려운 시간에 돌려두어 레벨을 쌓아 어려운 스테이지에 도전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맛있는 음식처럼 아껴먹고 싶다
테스트를 통해 처음 맛본 헤븐 번즈 레드는 한 번에 먹기 아쉬워 조금씩 아껴먹고 싶어지는 게임이었다. 다른 유저와의 경쟁 없이 스토리 자체에 집중할 수 있는 구성, 캐릭터 매력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면서도 갈등과 완화 사이에서 완급조절이 잘 된 스토리, 파고드는 재미를 맛볼 수 있는 밀도 높은 전투가 맞물리며 기존 모바일게임에서 느낄 수 없었던 색다른 재미를 전해준다. 일본에서 우마무스메를 꺾었던 전례가 우연이 아니라는 점을 체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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