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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기행] 빈약한 틀, 유저 드라마가 채운 세계관 '리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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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창기 '리니지' 커버 아트 (사진출처: 공식 홈페이지)

한국 게임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리니지’는 이제 누구나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문화’로 인정받고 있다. 1998년에 처음 시작된 ‘리니지’ 프랜차이즈는 오늘날까지도 여러 후속작을 낳으며 이어지는 중이고, 최근에는 넷마블에서 제작한 ‘리니지 2: 레볼루션’이 구글 플레이스토어의 최고 매출액을 갈아치우는 등 점점 주가를 올리고 있다. 오죽하면 세간에는 ‘리니지’ 프랜차이즈가 게임업계를 독식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그런데 이 ‘리니지’ 게임은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하나의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리니지’이다 보니, 그 세계관도 당연히 탄탄하고 짜임새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왜일까? 막상 ‘리니지’ 세계관이 어땠는지 생각해보면 떠오르는 게 별로 없다. 그 이유는 사실 ‘리니지’ 세계관이 그리 잘 만들어진 설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리니지’는 게임 주요 콘텐츠와 세계관 사이에 큰 괴리가 존재한다. 장황한 설정은 있지만, 그 내용은 유저의 실제 게임 활동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그렇기에 ‘리니지’를 하면서 세계관과 스토리 맥락을 느끼기는 매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니지’ 프랜차이즈가 이처럼 큰 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사람들은 ‘리니지’에 그리 열광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아마 ‘세계관’이 아닌 ‘게임 내러티브’에 있을 것이다. 초기에 ‘리니지’는 유저에게 독특한 체험을 선사해주는 대신, 유저가 스스로 스토리를 만들도록 유도했다. 즉 유저에게 스토리텔링을 위탁했던 셈이다. 그렇게 하면 더욱 다양한 스토리가 창출될 수 있으리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 결과는 어떨까?

내러티브는 강하고 스토리는 적었던 초창기


▲ 원작 '리니지'는 왕위를 되찾기 위해 피로 서약한 왕자와 기사들의 모험을 다루었다
(사진출처: 엔씨소프트 공식 블로그)

이미 유명한 이야기지만, 1998년에 출시된 MMORPG ‘리니지’는 원래 동명의 판타지 순정만화를 원작으로 삼고 있었다. ‘리니지’도 발매 초기에는 원작 세계관을 게임에 충실히 반영하고 있었다. 게임에 등장한 여러 지역과 인물은 원작 만화에서 따온 것들이며, 어느 정도는 전체적인 게임의 특징과 주제의식도 원작에서 차용했다고 볼 수 있다.

원작 만화 ‘리니지’는 부당하게 왕위를 찬탈당한 데포로쥬 왕자가 '어머니를 유혹해 왕이 된' 반왕 켄 라우헬에게 도전하는 내용을 그린다. 데포로쥬 왕자는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모아 피의 맹약으로 충성을 서약 받고, 결국 이들의 도움으로 찬탈자 켄 라우헬을 죽여 왕위를 되찾으며 만화는 끝이 난다. 이러한 내용은 중세 유럽 봉건제도를 낭만적으로 묘사한 기사문학(騎士文學)을 연상시킨다. 왕과 기사, 충성과 반역, 피로 맺어진 맹약. ‘리니지’에는 전통적인 로망스 모티프가 풍부했다.


▲ 초창기부터 '리니지'는 피로 맺은 맹약을 주요 소재로 내세웠다
(사진출처: 공식 홈페이지)

초기에는 게임 ‘리니지’도 원작과 이러한 기사문학 감수성을 공유했다. ‘리니지’의 가장 큰 특징은 ‘혈맹’ 시스템을 바탕으로 한 유저 집단간 경쟁이다. ‘리니지’ 세계는 몇 개의 ‘영지’로 나뉘어있고 각 영지는 해당 지역에 존재하는 ‘성’을 통해 관리된다. 특이한 점은 유저가 ‘혈맹’이라는 조직을 구성하여 성의 소유권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성을 얻은 혈맹은 영지의 NPC를 통해 판매되는 모든 아이템에 세금을 붙여 거두어들일 수 있다. 이렇게 모은 세금은 성을 소유한 혈맹의 소유가 된다. 그렇기에 성을 얻은 혈맹은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고, 이 재화를 바탕으로 캐릭터를 더 강하게 성장시킬 수 있다. 성을 얻은 혈맹은 세금 외에도 전용 사냥터에 출입할 수 있는 권한 등 다양하고 특별한 혜택을 얻었다.

하지만 모든 혈맹이 성을 가질 수는 없다. 서버당 성의 수는 한정되어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혈맹 사이에는 늘 성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이 벌어진다. 그 과정에서 같은 혈맹 소속 유저들은 성을 얻겠다는 동기를 공유하며 끈끈한 유대로 뭉치게 되고, 적대적인 혈맹에 대해서는 앙심과 적의를 품게 된다. ‘리니지’는 이처럼 혈맹과 성을 매개로 유저들이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관계를 맺도록 체제적으로 유도하고 있었다.

이러한 혈맹 활동 속에서 유저들은 원작 만화가 보여준 기사문학적인 감수성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게임이 얼마나 원작의 감성을 반영하고 있는지는 ‘리니지’ 유저 캐릭터의 모델을 보면 알 수 있다. 유저 캐릭터 대부분은 원작 주인공을 본 따 제작됐다. 예를 들어 혈맹을 창설할 수 있는 클래스인 ‘군주’는 데포로쥬의 모습이다. 요정, 마법사 클래스는 각각 데포로쥬를 섬기는 동료들을 모티프로 삼고 있다. 이들이 원작에서 데포로쥬의 왕권을 되찾아주기 위해 켄 라우헬과 사투를 벌인 수호기사라는 점을 감안하면, 게임 ‘리니지’에서 유저에게 요구되는 역할도 군주를 중심으로 모여 공동의 목적을 위해 신의로 뭉친 ‘혈맹’을 이루고 ‘성’을 쟁취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 '리니지'의 가장 중요한 콘텐츠라고 할 수 있는 공성전
(사진출처: 엔씨소프트 공식 블로그)

이처럼 ‘리니지’의 게임 내러티브는 ‘혈맹 시스템’을 매개로 한 유저간 협력과 갈등을 유도했다. 그 덕분에 ‘리니지’ 유저는 자신이 중세 무훈시에 나오는 기사가 된 것처럼 낭만적인 사회활동을 즐길 수 있었다. 그 속에는 일상에서는 불가능한 비장한 맹세, 생사를 가르는 전투, 권위의 획득 등이 가능했다. ‘리니지’는 유저에게 기사문학적인 파토스(Pathos)를 체험시켜주었다.

당시에 개발사인 엔씨소프트는 이러한 게임 내러티브를 정착시키는 데 우선 집중했다. 그랬기에 개발진은 유저가 활동할 무대와 게임 시스템만 제공하고, 그 안에서 스토리를 만들어나가는 것은 유저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이를 두고 ‘리니지’ 제작의 주역이었던 엑스엘게임즈 송재경 대표는 2012년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정글의 법칙이 통용되는 사회를 게임에 옮겨놓은 것”이라고 회고했다. 말 그대로 어떠한 간섭도 없이 유저가 만들어나가는 스토리텔링을 유도한 것이다.

하지만 그 탓에 ‘리니지’는 자체적인 세계관 설정과 스토리는 매우 빈약했다. 실제로 많은 유저가 세계관과 스토리를 하나도 모르는 채 게임을 즐겼다. 그래도 별 문제는 없었다. 꼭 모든 게임이 방대한 세계관과 스토리를 갖추어야 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리니지’는 세계관과 스토리는 비워놓은 대신 유저의 게임 참여를 유도하는 여러 요소를 적절하게 배치했다. 그 결과 ‘리니지’만 줄 수 있는 독특한 감성적 체험에 수많은 유저들이 매혹됐으며, 아마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인기의 큰 부분은 여전히 여기서 기인하고 있을 것이다.

실제 게임과 동떨어진 스토리 전개의 시작

하지만 2000년대 들어 ‘리니지’는 점차 혈맹을 중심의 내러티브에서 벗어난 스토리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혈맹과 아무 상관 없는 스토리를 세계관 차원에서 제시한 것이다.


▲ 켄 라우헬이 다크 엘프들을 불러들이며 스토리는 산으로 갔다
(사진출처: 공식 홈페이지)

변화는 2003년 ‘리니지’가 ‘크로스랭커’ 업데이트를 공개하면서부터 시작됐다. 당시에 ‘리니지’는 켄 라우헬을 상대로 한 왕좌 찾기라는 원작의 콘텐츠가 다 소진된 참이었다. 게다가 2001년에는 원작자 신일숙과 저작권 불화까지 불거진 상태였다. 이에 ‘리니지’는 더 이상 원작에 기대지 않은 새로운 스토리를 개척해야 했다. ‘크로스랭커’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게임만의 독자적 스토리 전개에 시발점이 된 업데이트였다.

‘크로스랭커’의 스토리는 원작과는 달리 켄 라우헬이 죽지 않고 도망치는 것으로 시작됐다. 그는 왕위를 되찾기 위해 지하에 거주하는 사악한 종족인 다크 엘프와 손을 잡고 지상침공을 유도하며, 이후로는 이계의 괴물과 악마까지 불러낸다. 이에 공식 설정상 왕위에 오른 ‘데포로쥬’는 지상의 모든 종족을 모아 연합군을 구성하여 켄 라우헬이 불러낸 괴물들과 맞서 싸우게 된다.


▲ 이계에서 소환된 마왕 '기르타스' (사진출처: 공식 홈페이지)

이상의 스토리는 어떻게 보면 선과 악의 대립을 다룬 통속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어쩌면 이 스토리가 뭐가 문제냐는 의문도 들 수 있다. 따지고 보면 ‘반지의 제왕’ 같은 전통적 판타지 명작도 이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내용이니 말이다. 사실 ‘크로스랭커’ 스토리 자체는 아무 하자가 없다. 문제는 이 스토리가 기존 ‘리니지’의 내러티브와 너무 동떨어진 내용이라는 점이다.

본래 ‘리니지’는 유저 스스로가 혈맹을 단위로 모여 군웅할거(群雄割據) 하며 드라마를 만들어가는 게임이었다. 그런데 ‘크로스랭커’는 갑자기 세상에 닥친 재앙을 막기 위해서 모두 힘을 합친다는 영웅적인 스토리를 제시했다. 이는 거의 ‘삼국지’에 마왕이 나타나서 삼국이 연합군을 구성하여 맞선다는 정도의 급격한 전환이었다. 그렇기에 ‘크로스랭커’ 이후의 ‘리니지’는 접하는 입장에서 감수성이 크게 차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기존 게임 내러티브가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전체 세계관 속에서 어떤 스토리가 진행되든 간에 유저들은 여전히 혈맹과 공성전을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고 있었다. 하지만 ‘크로스랭커’ 이후의 리니지 세계관은 데포로쥬가 정당하게 왕위를 되찾아서 켄 라우헬이 불러낸 괴물과 맞선다는 스토리이므로, 활발하게 벌어지는 혈맹간 공성전을 제대로 설명해낼 수 없었다. 즉 게임 세계관과 실제 게임 내에서 벌어지는 유저 활동 사이에 괴리가 생긴 것이다.

이는 명백히 실제 유저 활동과는 동떨어진 세계관 설정이었다. 그러나 제작사 엔씨소프트는 유저 활동을 반영하지 않은 세계관을 계속 확장시켜나갔다. 이러한 행태는 후속작 ‘리니지 2’에서 특히 심하게 나타났다. ‘리니지 2’는 전작인 ‘리니지’의 시점으로부터 150년 전 시대를 무대로 한 MMORPG로, 여전히 혈맹 단위의 유저간 협동과 경쟁을 메인 콘텐츠로 삼았다. 그러나 무척 뜬금 없게도 ‘리니지 2’ 공식 홈페이지의 세계관 설명을 보면 거의 절반 가까운 분량이 세상의 창조를 설명하는 데 할애되고 있다. 하지만 여기 나오는 신과 태초의 존재들 중 일반 유저가 만나볼 수 있는 존재는 거의 없다. 세계관이 실제 게임과는 따로 놀게 된 셈이다.

물론 모든 게임에 방대한 세계관과 짜임새 있는 스토리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리니지’는 초창기에 복잡한 스토리 없이도 뛰어난 게임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초기 스토리는 단순하나마 게임 내러티브와 잘 조화된 내용이었다. 반면 ‘크로스랭커’ 이후의 ‘리니지’ 세계관은 실제 게임과 괴리된 장황한 설정과 스토리를 늘어놓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는 전보다도 유저가 게임 내에서 직접 체험하고 이입할 수 있는 세계관 스토리텔링은 더욱 적어지고 말았다.

결국 유저에게 스토리텔링 의탁한 ‘리니지’ 세계관

이처럼 게임 세계관이 실제 게임 활동과 조화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리니지’는 자주 훌륭한 온라인게임 스토리텔링 예시로 꼽힌다. 하지만 이는 게임 세계관이 제공하는 스토리텔링이 아닌, 유저들이 모여서 스스로 일구어낸 스토리텔링이다. 이러한 유저 스토리텔링에 ‘리니지’ 세계관이 기여하는 바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 '바츠해방전쟁'을 기념해 엔씨소프트에서 제작한 아트
(사진출처: 엔씨소프트 공식 블로그)

그 좋은 예시가 바로 ‘리니지 2’의 소위 ‘바츠해방전쟁’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이 사건은 2004년 ‘Dragon Knights’라는 혈맹이 바츠 서버의 모든 성을 소유하고 폭정을 일삼자 일반 유저들이 모여 조직적으로 4년간 항거, 결국 최고급 장비를 갖춘 고레벨 캐릭터들로 구성된 ‘Dragons Knights’ 혈맹을 몰아낸 일화다. ‘바츠해방전쟁’에는 1년당 약 20만 명의 인원이 참가한 것으로 추산되어 ‘인터넷 민주화운동’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 사건은 이후 경기도 미술관에서 ‘바츠혁명전’이라는 예술제를 개최했을 정도로 큰 유명세를 얻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유저들이 만들어낸 게임 외적 스토리다. 여기에 ‘리니지 2’가 제공해준 것은 혈맹 시스템과 공성전 뿐이다. 5,300여 단어에 달하는 ‘리니지 2’의 장황한 세계관 설정 중 이 사건에 기여한 내용은 단 하나도 없다. 그 외에도 ‘리니지’ 하면 기억날 만한 스토리는 대부분 게임이 자체적으로 제공해주는 것이 아닌, 게임을 즐기는 유저들 사이에 벌어진 사건뿐이다. 이는 좋게 보면 ‘리니지’가 제작진이 손대지 않아도 유저들이 알아서 계속 드라마를 만들어갈 수 있는 내러티브를 구축했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면으로는 마치 ‘리니지’가 유저들에게 스토리텔링을 아예 의탁해버린 듯한 느낌이 든다.

세계관과 스토리는 유저의 체험에 맥락과 의미를 부여해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세계관에 대한 이해를 통해 유저는 게임 속 세상에 보다 몰입하고 극적인 체험을 할 수 있게 된다. 아무리 유저가 스스로 스토리를 만들어낸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유저 스토리텔링을 돕고 방향성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세계관이 필요하다. 그런데 과연 ‘리니지’는 ‘이용자가 만들어가는 스토리를 뒷받침해주는 세계관’을 갖추고 있을까?

▲ '진명황의 집행검'은 3000만 원 넘는 가격에 거래되지만, 정작 진명황이 누군지 아는 사람은 적다
(사진출처: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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