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유명 게임음악 작곡가 야마오카 아키라가 해외 유튜버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주제는 그가 제작에 참여한 신작 공포게임 더 미디엄에 대한 내용이었지만, 세간의 관심이 몰린 건 인터뷰 말미에 잠깐 나온 얘기였다. 그의 후속작이 사일런트 힐 시리즈 신작이라고 해석될 수 있는 언급이 나왔기 때문이다. 물론 직접적으로 사일런트 힐을 언급한 것은 아니나, 그의 상징성이나 전후 대화 맥락을 보면 사일런트 힐을 암시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사일런트 힐은 한때 바이오하자드 시리즈와 더불어 일본 공포게임 양대 산맥으로 불리던 프랜차이즈였다. 범서양권에서 특히 인기를 끌어, 2006년엔 영화로 제작되며 게임에 관심 없는 사람도 익히 아는 IP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이 프랜차이즈는 쇠락의 길을 걸었고, 2012년 이후엔 정식 신작이 나오지 않으며 사실상 맥이 끊기고 말았다.
과연 사일런트 힐은 어떻게 태어났고, 어떻게 명성을 쌓다가 쇠락했을까? 왜 팬들은 아직도 신작을 기다리며 야마오카 아키라의 언급에 열광하는 걸까? 이번 주에는 최근 신작 기대감으로
회사의 방치 속에서 피어난 의외의 대작
1994년 12월 출시된 소니의 게임 콘솔 플레이스테이션은 게임시장에 많은 변화를 몰고 왔다. 그 중 하나는 단연 3D 공포게임의 부흥이었다. 특히 1996년 나온 캡콤의 바이오하자드는 3D 그래픽으로 끔찍하고 공포스러운 식인 좀비의 모습을 연출해냈다. 비록 시대적 상황 탓에 많은 연출을 프리 렌더링에 의존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바이오하자드는 시장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게임의 상업적 성공을 기점으로 다양한 콘솔용 3D 공포게임들이 출시되기 시작했다.
코나미의 사일런트 힐도 이처럼 바이오하자드 이후 시작된 3D 공포게임 개발 흐름을 타고 출시된 게임이다. 그러나 애초에 코나미는 사일런트 힐에 그리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사일런트 힐을 제작한 팀 사일런트는 1996년 10인 규모로 시작했는데, 당시 개발 총괄을 맡은 토야마 케이치로는 고작 경력 2년차 초보 개발자였다. 다른 팀원들도 기존에 이렇다 할 실적을 쌓은 인물들이 아니었다. 즉, 대형 프로젝트보다는 신선한 무언가를 기대할 일종의 실험적인 팀이었던 셈이다.
그 탓에 팀 사일런트는 개발에 있어 코나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다. 심지어 3D 게임을 개발함에도 불구하고 전문화된 3D 그래픽 기술을 가진 팀원조차 드물었다. 1999년 3월 U.S. PS 매거진 인터뷰에 따르면, 이미 캐릭터 디자인 및 CGI 제작 업무를 맡고 있던 타카요시 사토가 시네마틱 영상도 전부 혼자 만들어야 했을 정도로 인력이 부족한 상태였다. 심지어 사토는 2D 아티스트였으나, 회사 지원 없이 독학으로 3D 기술을 배워 이 작업을 수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치는 역으로 팀 사일런트의 독립성을 키웠다. 코나미는 팀 사일런트에 별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팀을 해체하지도 않았다. 당시만 해도 게임 개발에 드는 비용이 오늘날 수준으로 높지는 않았기에 밑져야 큰 손해가 아니라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이에 팀 사일런트 멤버들은 잠까지 줄여가며 코나미가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다른 게임을 만들어냈다. 그 게임이 바로 1999년 2월 출시된 사일런트 힐이다. 당시 인기를 끌던 바이오하자드와 달리, 사일런트 힐은 미스터리한 공포를 핵심으로 내세웠다.
바이오하자드는 바이러스 병기에 노출된 사람들이 생물학적 변이를 일으켜 좀비가 되고, 주인공 특수부대원들이 고립된 저택이나 도시에서 좀비를 물리치고 탈출하는 과정을 다뤘다. 따라서 바이오하자드의 공포는 괴물들에 둘러싸여 궁지에 몰린 데서 기인하는 면이 컸다. 어쨌거나 주인공들도 특수부대원이기에 기본적으로 무장을 했고, 괴물들과 싸워 길을 뚫는다는 면에서는 나름 호쾌한 면도 있었다.
반면 사일런트 힐은 보통 사람이 어느 휴양지에서 느닷없이 겪게 되는 심령현상을 소재로 했다. 주인공 해리 메이슨은 아내와 사별하고 혼자 딸을 키우는 소설가다. 그는 아내가 살아있던 시절사일런트 힐이라는 시골 휴양지에 갔다가 길가에 방치된 한 아기를 찾았고, 이 아기를 입양하여 쉐릴이라고 이름 붙여 키웠다. 아내가 사망한 후 혼자 쉐릴을 키우던 그는 어느 날 휴양 목적으로 다시 사일런트 힐을 찾는데, 안개 속에서 기이한 환영을 보고 자동차 사고를 일으킨다.
자동차 사고가 일어난 후 해리 메이슨은 딸 쉐릴이 사라진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이후 그는 딸을 찾기 위해 짙은 안개에 잠긴 사일런트 힐을 방황한다. 하지만 이 마을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고요한 데다, 사람도 이웃 마을에서 온 경찰 시빌 베넷과 겁에 질린 채 숨어있던 간호사 리사 갤런드, 비밀을 감춘 의사 미하일 카우프만, 그리고 정체불명의 노파 한 사람 외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깊이 들어갈수록 그는 악몽에서 나온 듯 끔찍한 외모의 괴물까지 마주하게 된다.
안개 속을 배회하는 괴물과 악몽처럼 수시로 바뀌는 주변 환경에 시달리면서도, 해리 메이슨은 서서히 사일런트 힐에 얽힌 비밀을 파악하게 된다. 사실 이 마을은 고대 북미 원주민이 신성하게 여기던 땅이었다. 훗날 유럽인들이 와 원주민을 학살하고 그 땅에 식민지를 세웠지만 전염병이 돌아 주민이 전멸했고, 이후 사람이 없어 조용하다는 뜻인 사일런트 힐이라 이름 붙여졌다. 세월이 지나 다시 사람이 정착한 후에도 이 마을에 기이한 현상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 신비한 힘에 주목한 이들이 있었다. 소위 교단이라는 이단집단이었다. 이단적 기독교 사상과 북미 원주민 신앙을 악마적 방식으로 결합한 교리를 기반으로, 교단의 성녀가 오염된 세상에 종말을 고하고 자신들을 낙원으로 인도해줄 신을 낳으리라는 믿음을 품은 이들이다. 이들 교단은 일찍이 사일런트 힐에 정착해 이미 광업과 의료부문 진출을 통해 마을을 장악했고, 배후에서 인신공양을 동반한 사악한 의식으로 흑마술을 수행 중이었다.
그 중에서도 교단의 고위 여사제 달리아 길레스피는 사일런트 힐의 영향인지 특별한 힘을 지닌 딸 알레사를 낳았다. 달리아는 알레사가 어릴 때 신을 잉태할 수 있는 힘을 불어넣어야 한다며 산 채로 불을 붙였고, 그 결과 알레사는 전신이 새카맣게 탄 불구가 되고 말았다. 허나 실제로 알레사는 신비한 힘을 각성했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자기 영혼의 일부를 조각내 방출한 것이다. 떨어진 영혼 조각은 물리적인 모습을 갖추고 아기가 됐는데, 그 아기가 바로 쉐릴이었다.
떨어진 영혼 쉐릴이 해리 메이슨에게 입양돼 행복하게 살아가는 동안에도, 본체 알레사는 피와 고름을 흘리며 병원 신세를 지며 생을 이어갔다. 그러는 동안 고통과 분노로 알레사의 영적인 힘은 더 강화됐고, 마침내 현실을 일그러뜨리기 시작했다. 게임 중 사일런트 힐이 안개에 둘러싸인 것도 알레사의 영향이었던 것이다. 또한 마을의 괴물도 모두 알레사의 분노와 증오, 질투 등 감정이 투사돼 나타났거나, 사람이 변이된 결과물이었다.
알레사의 고통받은 심상이 반영된 뒤틀린 이면세계를 헤맨 끝에, 해리 메이슨은 달리아 길레스피와 알레사를 찾아낸다. 그러나 이미 딸 쉐릴은 본체인 알레사에게 흡수된 뒤인 데다, 설상가상으로 완전해진 알레사는 악마적 존재를 출산하기 시작한다. 플레이 과정에서 누적해온 선택지에 따라 해리는 알레사를 죽일 수도, 혹은 알레사가 낳은 악마적 존재만 죽일 수도 있다. 일단 공식 스토리라인은 악마적 존재만 죽이는 방향으로 설정돼 있다.
이렇듯 보통 사람이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초자연적인 현상에 노출되고, 자신의 공포와 욕망이 반영된 악몽과 현실 사이에서 헤매는 독특한 내러티브는 사일런트 힐 만의 독특한 특색으로 자리매김 했다. 토야마 케이치로는 영화 야곱의 사다리나 소설 미스트 등 현실과 광증을 분간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심리적 불안이 증폭되는 부류의 공포 장르 작품을 참고했다고 언급했는데, 실제 게임도 그러한 내러티브로 구성된 셈이다.
사일런트 힐은 독특한 내러티브 덕분에 출시 직후 빠르게 인지도를 얻었다. 수많은 좀비와 변이괴물들에게 쫓기며 싸우는 바이오하자드의 스플래터 공포와는 차별화된, 소위 심리적 공포를 추구한 점이 부각된 덕이었다. 사일런트 힐은 메타크리틱 기준 86점이라는 좋은 점수를 받았고, 타카요시 사토가 개인 홈페이지에서 전한 바에 따르면 2007년까지 전세계적으로 약 200만 장이 판매됐다. 코나미의 외면을 받았던 것 치고는 게임성과 상업성 모두 준수한 성취를 이뤘다.
그러나 사일런트 힐이 거둔 성과에도 불구하고 코나미와 팀 사일런트 사이의 거리감은 줄어들지 않았던 것 같다. 회사의 방치 속에서도 팀을 이끌어 사일런트 힐이라는 수작을 만들어낸 개발 총괄이었던 토야마 케이치로가 그 길로 코나미를 떠났으니 말이다. 그래도 나머지 팀원들은 잔류하여 사일런트 힐 프랜차이즈를 계속 개발하기로 했고, 팀 전체 규모도 40인으로 네 배 확장됐다. 천덕꾸러기 신세였던 팀 사일런트가 본격적으로 코나미의 관리를 받게 된 것이다.
천덕꾸러기였던 사일런트 힐, 코나미의 자랑스러운 간판 프랜차이즈 되다
기대도 안 했던 사일런트 힐이 예상 외로 높은 판매량을 보이자, 코나미는 즉시 사일런트 힐 2 제작을 지시했다. 사토 타카요시는 개인 홈페이지에서 사일런트 힐 2 개발이 1999년 6월 시작됐다고 언급했는데, 이는 거의 사일런트 힐 출시 직후였다. 전작 제작 총괄을 맡았던 토야마 케이치로가 코나미를 떠났기에, 사일런트 힐 2는 전작 주요 개발자 중 한 사람이었던 사토가 대략적인 방향성을 입안해야 했다.
2011년 가마수트라 인터뷰에서 사토 타카요시는 사일런트 힐 2 주제의식에 대한 주요한 영감을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얻었다고 이야기했다. 사일런트 힐은 북미 원주민 성소였던 곳이 이단 종파 흑마술 의식에 의해 오염돼 알레사의 고통이 투사된 영적 세계로 연결되는 이야기를 다루었는데, 사토는 그 중 특히 사일런트 힐의 영적 세계가 개인의 심리를 반영한다는 데 초점을 맞췄다. 개인의 욕망과 죄책감이 반영된 개인적인 지옥 말이다.
2001년 9월 출시된 사일런트 힐 2은 불치병으로 아내를 잃고 좌절한 채 살아가던 사내 제임스 선덜랜드가 정체불명의 편지를 받는 데서 시작한다. 놀랍게도 편지는 이미 죽은 아내인 메리가 보넀으며, 사일런트 힐에서 다시 만나자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수상한 편지지만, 절망에 빠져 있던 제임스는 다시 아내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을 품은 채 사일런트 힐로 떠나고, 그 곳에서 안개에 감싸여 길을 잃은 채 헤매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면의 세계로 넘어가버리고 만다.
제임스는 그 곳에서 몇몇 사람을 만나지만, 사정은 비슷하다.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말 못할 옛 사연을 품고, 과거를 못 잊은 미망 때문에 이곳에 왔다. 그들은 내면의 어둠에 맞춰 각기 다른 것을 보거나 겪는다. 예를 들어 젊은 여성 안젤라 오레스코는 친부에게 강간당하다 그를 살해한 과거가 있는데, 성행위 동작을 연상시키는 기괴한 움직임의 괴물들에게 쫓기게 된다. 아버지에 대한 공포와 증오, 역겨움이 그러한 존재를 만들어낸 것이다.
제임스 선덜랜드도 자신에게 맞춰진 지옥을 체험하게 된다. 예를 들어 그는 아내가 불치병으로 시달리는 동안 큰 욕구불만에 시달렸고, 병원 복도에서 여간호사들을 볼 때마다 성욕을 품었다. 그렇기에 그의 앞에 등장하는 괴물 중에는 색기 있는 몸매에 노출이 심한 간호사복을 입은, 그러나 머리는 무언가 감싸여 뒤틀린 채 허우적대며 걸어 다니는 버블헤드 너스가 있다. 이 존재들은 제임스의 억눌린 욕망과 죄책감이 투영된 결과물이다.
그 외에 등장하는 괴물이나 초자연적 현상도 대부분 제임스 선덜랜드의 과거나 심리와 연관이 있다. 사실 그의 아내는 병으로 죽은 것이 아니었다. 병원에서도 메리의 치료를 포기하자, 오랜 병수발과 아내의 히스테리에 지친 제임스는 그만 메리를 베개로 짓눌러 질식사 시키고 말았다. 이후 그는 죄책감 때문에 착란에 빠진 나머지 자신이 아내를 죽였다는 사실조차 잊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에게는 계속 아내를 닮은 여자가 계속 끔찍하게 살해되는 모습이 반복적으로 보인다.
이렇듯 미련과 죄책감으로 인해 사일런트 힐로 온 사람들이 이면세계에서 개인화된 지옥을 체험하게 된다는 이야기는 뭇 게이머들에게 깊은 여운을 남겼다. 단순히 미지의 기괴한 존재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넘어서, 자기 잘못으로 잃어버린 소중한 것에 대한 집착과 후회라는 애절하고도 씁쓸한 감정을 곱씹게 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플롯은 폴란드 SF작가인 스타니스와프 렘의 솔라리스를 답습한 것이나, 이 서사를 게임으로 스토리텔링한 것은 사일런트 힐 2의 성취였다.
감수성 짙은 여운이 남는 스토리텔링을 보여준 사일런트 힐 2는 PS 버전이 메타크리틱 기준 89점을 달성했고, 판매량도 2001년 코나미 발표에 따르면 한 달 만에 100만 장을 달성했다. 전작 총 판매량 절반을 한 달 만에 성취한 셈이었다. 이러한 고무적 성과에 코나미도 사일런트 힐을 주요 프랜차이즈로 인정했다. 팀 사일런트는 후속작인 사일런트 힐 3 제작을 2001년 9월에 시작했는데, 이는 사일런트 힐 2 PS 버전이 발매되자 마자 바로 시작했다는 뜻이다.
2003년 5월 발매된 사일런트 힐 3는 시리즈 첫 번째 게임 사일런트 힐과의 연계를 강조한 작품이었다. 사일런트 힐의 결말 중 하나는 알레사가 죽으며 새로운 아기로 환생하고, 주인공 해리 메이슨이 이 아기를 다시 한 번 딸로 받아들여 키우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사일런트 힐 3는 이 결말에서 이어지는 내용이다. 새로운 주인공은 이 아기, 즉 알레사의 환생인 헤더다. 어떻게 보면 전작의 보스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고도 볼 수 있는 셈이다.
얼마 간의 시간이 흐른 다음, 해리는 알레사의 환생체인 아기가 쉐릴의 기억을 모두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기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이미 죽은 자기 아내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해리는 새 딸이 옛 쉐릴의 정체성을 이어받았다는 데 기뻐하는 동시에, 지난 사건이 반복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빠진다. 그리고 이 불안은 오래지 않아 실제적인 위협으로 찾아온다.
사일런트 힐의 교단은 모두 죽은 것이 아니었다. 조직을 정비한 교단은 알레사가 죽은 후 그 환생체를 해리 메이슨이 데리고 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정보원을 풀어 해리의 행방을 찾기 시작했다. 소설가라는 공개된 신분이었던 해리는 오래지 않아 발각됐다. 계속되는 추적에 해리는 계속 주소지를 옮기고, 새 딸로 삼은 환생체의 이름도 쉐릴에서 헤더로 개명했다. 심지어 추적을 피하기 위해 헤더 머리카락을 환한 금발로 염색하기도 한다.
결국 사일런트 힐로부터 17년 후, 교단은 계속 주소지를 옮기고 불안에 쫓기며 살아가던 해리 메이슨과 헤더를 찾아낸다. 그러나 헤더는 새로운 인생을 살며 내면의 증오가 사라진 상태였고, 그 탓에 교단이 원하는 신을 낳을 수 없었다. 이에 교단 여사제 클로디아 울프는 헤더를 차츰 겁에 질려 불안하게 만들고, 아버지 해리를 살해해 증오심을 키운다. 결국 헤더는 성장하는 과정에서 잊고 지낸 알레사의 기억과 감정을 대부분 각성하게 된다.
게임 결말에서 헤더는 결국 자기 내부에서 자라던 신의 태아를 토해내고, 여사제가 그것을 삼켜 불완전한 신을 낳는다. 헤더는 이 신을 죽이지만, 그 후의 운명은 플레이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후속작에서 이어지는 스토리에 따르면 기본적으로는 아버지의 복수를 이루고 현실세계로 돌아와 살아간다는 내용이다. 특히 해리 메이슨의 유지에 따라, 다시 이름을 쉐릴로 바꾸고 아버지의 묘비 앞에서 애도하는 장면은 전작 팬들에게 깊은 여운을 남겼다.
사일런트 힐 3 역시 메타크리틱 기준 PS2 버전 85점으로 준수한 평가를 받았지만, 판매 실적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코나미 2003년 실적 자료에 따르면 사일런트 힐 3은 동해 11월까지 6개월 동안 30만 장이 판매됐다. 전작의 폭발적 반응에 비하면 아쉬운 판매량이었다. 이는 전반적으로 훌륭한 품질과 전작 연계성에도 불구하고, 신선한 주제의식이나 게임 시스템, 혹은 괄목할 만한 그래픽 향상이 없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사실 사일런트 힐 3는 제작 예산과 개발 팀 규모가 증가하긴 했지만, 다소 급하게 제작됐기에 참신함을 담보하기 힘들 거라는 예상을 받아 왔다. 이에 팀 사일런트는 사일런트 힐 3 개발과 동시에 완전 새로운 스타일의 공포게임을 구상했다. 당시 이 프로젝트는 ‘룸 302’라고 명명됐는데, 귀신 들린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주 소재로 삼았다. 이후 사일런트 힐 3이 참신함 부재로 지적 받자 코나미는 ‘룸 302’를 곧바로 투입했다.
그렇게 개발에 착수한 것이 사일런트 힐 4: 더 룸이다. 사일런트 힐 4: 더 룸은 2003년 10월에 이미 IGN 보도를 통해 개발 사실이 보도됐고, 이듬해 1월 코나미 발표를 통해서 공식 확인됐다. 이 역시 사실상 전작이 출시되자마자 휴식도 없이 바로 개발에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이 게임이 출시된 시기는 PS2 버전 기준 2004년 6월이다. 아무리 사일런트 힐 3 제작과 동시에 구상했다는 점을 감안해도, 사실상 1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급히 제작된 셈이다.
발매 직전 열린 E3 2004에서 사일런트 힐 4: 더 룸은 귀신 들린 아파트라는 새로운 배경과 폐소공포증을 자극하는 신선한 분위기로 많은 기대를 받았다. 하지만 출시 후 완성도 측면에서 적잖은 비판을 감당해야 했다. 기획과 플롯이 참신하고 연출도 좋았지만, 결국 근본적인 게임성은 별 차이가 없고 보스나 레벨 볼륨은 감소했다는 지적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결국 사일런트 힐 4: 더 룸은 메타크리틱 기준 76점이라는 아쉬운 평가를 받아야만 했다.
매출도 마찬가지였다. 게임산업 웹진 게임인더스트리 비즈 조사에 따르면, 사일런트 힐 4: 더 룸은 발매 첫 주 일본 콘솔 게임 판매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지만 한 주 만에 10위까지 떨어지며 급격한 하락세를 보였다. 일본 첫 주 판매량은 4만 1,000여 장으로 집계됐다. 코나미 공식 발표는 아니지만, 전작 사일런트 힐 2나 사일런트 힐 3에 비해 턱없이 낮은 수치다.
이러한 판매 부진 때문이었을까? 2005년 코나미는 돌연 팀 사일런트를 해체시켰다. 공식적으로 팀 해체 사유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훗날 사일런트 힐: 홈 커밍 제작에 참여하는 아티스트 켄지 라마르는 코나미가 사일런트 힐 프랜차이즈에 새 방향성을 부여하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실적이 점점 부진해지자 프랜차이즈에 큰 변화를 주길 원했고, 그 방향을 두고 팀 사일런트와 마찰을 빚다가 팀을 해체했다는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코나미가 기존 팀 사일런트 개발 방향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왜냐하면 이후 코나미가 사일런트 힐 개발을 외주로 맡기며 시리즈 분위기에 크나큰 변화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변화는 긍정적이지 못했다. 이후로 사일런트 힐 시리즈는 차츰 쇠락의 길을 걷고, 이내 사실상 동결되기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외주로 넘어간 사일런트 힐 시리즈
팀 사일런트 해체 후에도 코나미는 한동안 사일런트 힐 프랜차이즈를 간판으로 사용할 생각이 있었던 듯 하다. 2007년 발매된 사일런트 힐: 오리진은 나름 시리즈 첫 게임 사일런트 힐 1편의 시퀄로, 과거 알레사가 어떤 과정을 통해 영혼이 분리되고 해리 메이슨을 만났는지 다루었다. 전작과의 연계를 강조하고 과거사를 설명해 팬덤 기대를 모았지만, 게임 구성 자체는 전작에서 변화한 부분이 없어 혹평을 받아야만 했다.
이어 2008년 나온 사일런트 힐: 홈커밍은 더 참담한 결과를 맞았다. 특수부대 출신인 알렉스 셰퍼드가 고향에 돌아왔다가 벌어지는 괴사건을 다루는데, 교단이 배후에서 수행한 흑마술 의식을 무력이 출중한 주인공이 조사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연출은 영화화된 사일런트 힐을 따라하는 데 그쳤고, 플롯도 전작인 사일런트 힐 2의 구조를 거의 그대로 차용한 데다, 전투 파트가 공포를 반감시킨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시리즈 첫 게임인 사일런트 힐을 리메이크 한 2009년 출시작 사일런트 힐: 섀터드 메모리즈는 나름대로 좋은 평가를 얻었다. 원작의 플롯을 독특하게 재해석하고 참신한 반전을 부여했다는 점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스토리와 소재에 있어 사일런트 힐을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던 면에서는 여전히 전작들의 그림자 안에 있었다.
시리즈 쇠락의 종점을 찍은 것은 사일런트 힐: 다운포어였다. 호송 중이던 죄수가 탈주 중 우연히 사일런트 힐에 가게 되고, 그 곳에서 자신의 범죄적인 욕망과 죄책감이 만들어낸 초자연적 현상을 겪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 게임은 앞서 언급한 사일런트 힐: 더 룸과 비슷한 관점에서 비판을 받았다. 새로운 분위기와 스토리, 입체적인 주인공, 플레이어 선택이 미치는 영향 등은 참신하다는 찬사를 받았지만, 괴물 디자인과 연출, 기술적 퍼포먼스에 지나친 질적 퇴보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괜찮은 플롯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기술적인 기준에 부합하지 못했던 사일런트 힐: 다운푸어는 메타크리틱 기준 64점이란 참담한 점수를 받았고, 코나미 측도 본래 예정돼 있던 PC 버전 출시를 취소하는 등 급히 지원을 끊는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코나미에게 외주를 받아 개발을 담당했던 체코 게임 개발업체 바트라 게임즈는 출시 4개월 후 도산했기에, 이 게임이 실패했다는 인상을 더욱 강하게 남기고 말았다.
그 외도 코나미는 하우스 오브 더 데드를 벤치마킹한 사일런트 힐 더 아케이드나, 모바일 슈팅게임 사일런트 힐: 더 이스케이프, 던전크롤 게임 사일런트 힐: 북 오브 메모리즈 등 다양한 외전을 발매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중 대부분은 게임성과 상업성 양방에서 쓰라린 성적을 거둬야 했다. 사일런트 힐 프랜차이즈가 쌓아온 이미지와 너무 다른 게임이었을 뿐더러, 완성도 측면에서도 아쉬움이 남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마지막 희망은 사일런트 힐즈 개발 소식이었다. 공포영화 감독으로 유명한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과 메탈기어 시리즈를 만든 코지마 히데오, 괴기만화가 이토 준지 등 쟁쟁한 사람들이 제작에 참여한다는 사실로 큰 기대를 끈 공포 게임이었다. 그러나 이 게임은 결국 완성되지 못한 채 프로젝트가 취소됐는데, 이 역시 코나미의 일방적인 조치였다. 비디오게이밍247 인터뷰에서 델 토로는 코나미가 사일런트 힐을 없애 버리고 싶어했다며 실망을 토로했다.
이처럼 사일런트 힐은 바이오하자드와 차별화되는, 현실과 악몽의 세계를 오가며 초자연적인 현상에 얽힌 사연을 알아내는 미스터리 오컬트 공포물로서 명성을 쌓았다. 그러나 지나치게 빠른 개발 주기로 인해 시리즈는 차츰 참신함을 잃었고, 가끔 시도된 참신한 시도 역시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해 기술적인 허점을 보여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사일런트 힐은 차츰 성공한 전작들에 기대는 진부한 시리즈가 됐고, 그렇게 막을 내린 듯 보였다.
지옥으로 간 사일런트 힐, 돌아올 수 있을까?
그럼 정말로 사일런트 힐은 이렇게 끝난 것일까? 팬덤에서는 아직도 옛 시절의 향수를 잊지 못하고 있는 모양새다. 여전히 소니가 코나미로부터 IP 라이선스를 대여해 원작 개발진을 모아 신작 개발을 진행 중이라는 등의 루머가 돌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최근 이 루머가 사실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사일런트 힐 시리즈 OST를 제작한 작곡가인 야마오카 아키라가 해외 유튜버와 진행한 인터뷰 중 사일런트 힐 신작 발표로 추측되는 발언을 한 것이다. 내용인 즉, 2021년 여름 발표될 신규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며 당신이 듣고 싶어하는 것 중 하나일 것이라는 언급이었다. 야마오카가 사일런트 힐 OST로 유명한 점이나, 인터뷰 전후 맥락상 사일런트 힐 신작을 추측하게 하는 발언이었기에 팬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특히 해당 유튜브 영상은 ‘누군가’의 요청으로 삭제됐는데, 일각에서는 유통사 측에서 야마오카 아키라가 사전에 합의되지 않은 개발 정보를 우회적으로 언급했기 때문에 삭제를 요청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 추측대로면 사일런트 힐 신작 소식이 2021년 여름 발표될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과연 2012년 이후 정식 시리즈 개발이 중단됐던 사일런트 힐이 9년의 세월을 넘어 돌아올 수 있을지, 그 귀추가 주목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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