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이 사람이 그 심오하고 오묘하며 섬세한 레드블러드 세계관의 창시자란 말인가?’
‘레드블러드’의 김태형 작가를 만났을 때 들었던 첫 느낌이었다. 평소 ‘레드블러드’의 독특한 세계관과 섬세하고 세밀한 그림체 등을 바탕으로 ‘레드블러드’의 작가는 매일 밤을 전문서적에 파묻혀 살 것 같은 모범생 스타일이라고 상상해 왔었다. 하지만 의외로(?) 얼굴에 늘 미소를 띠우며 사근사근한 목소리를 지닌, 비교적 순수한(?) 캐릭터였다.
김태형 작가는 ‘개미맨’이란 작품으로 대중에게 이름을 알렸고, ‘레드블러드’로 그만의 색깔을 다졌다. 특히 ‘레드블러드’는 독특한 세계관과 세련된 그림체로 미국에서 스카우트제의까지 받았을 정도다.
▲ 은근(?) 순박한 외모의 소유자~! 마음씨도 외모처럼 순수하셨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미국 진출 이야기가 거론된 후 김태형 작가는 대중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러했던 그가 갑작스레 게임 아트 디렉터로, 그것도 자신의 작품인 ‘레드블러드’를 원작으로 하는 온라인게임을 손에 들고 등장했다. 과연 김태형 작가에게 어떤 일이 있었길래 만화 그리기를 잠시 멈추고 게임계로 발을 들여놓게 됐을까?
“저요? 그냥 반에서 그림 좀 그린다는 아이였어요.”
김태형 작가가 처음 자신의 그림을 인정 받은 것은 유치원 때다. 크리스마스를 기념해 부활절 관련 그림으로 엽서를 꾸며오라는 선생님의 지시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 때부터 남들과 다르게 자신만의 스타일로 엽서를 꾸몄고, 이런 그의 남다름이 유치원 선생님의 눈에 들었다고.
“어렸을 때는 멋도 모르고 느낌이 가는 데로 그렸는데 그게 오히려 선생님 눈에 들었나 봐요.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더라고요. 그 때 제가 그린 그림이 인정받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하고 깨달았죠.”
그 후 김태형 작가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다. 알고 지내던 친구 2명과 함께 아마추어 동아리 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 고릴라바나나 내부, 굉장히 깔끔하다
“제가 학생일 당시 각 동네 문구점에는 일본에서 불법으로 들여온 만화들이 성행하기 시작했고,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보며 감동에 젖곤 했죠. 그 때부터 친구들과 함께 본격적인 동아리 활동을 하기 시작했어요.”
이 때 김태형 작가와 함께 동아리 활동을 하던 친구는 만화 ‘힙합’을 그린 김수용 작가, 현재 인디만화 계에서 활동 중인 이병철 작가였다고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당시 이 3명은 아마추어 만화 계의 삼총사라 불렸다고 전했다.
우연히 찾아온 기회 뒤에 피나는 노력
김태형 작가는 이렇게 아마추어 만화를 그리며 활동하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됐을 때 본격적으로 만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당시 만화가라 하면 먹고 살기 힘든 직업이라는 인식이 있어서 집안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이 같은 가족의 반대에 김태형 작가는 숙식 가능한 아르바이트를 하며 열심히 그림 연습에 전념했다. 이러했던 그에게 뜻밖의 데뷔 기회가 찾아오게 된다.
“당시 아르바이트생 생활을 전전긍긍하다 ‘나는 깍두기’, ‘마나’로 유명한 이빈 작가의 작품을 돕는 일을 하게 됐죠. 그리고 이빈 작가와 함께 출판사를 갔는데 해당 출판사에서 혹시 제 작품이 있으면 한 번 보자고 하는 거에요. 그래서 출판하게 된 작품이 통제구역이었습니다.”
이후 김태형 작가는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린 데 크게 기여한 작품 ‘개미맨’을 출판하게 된다. ‘개미맨’의 출판도 그의 데뷔작처럼 우연한 기회를 통해 이뤄졌다.
▲ 아는 사람은 아는 국산 히어로 '개미맨'
“사실 초창기 개미맨 원고를 들고 국내에서 유명하다는 출판사를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거절을 당했어요. 이 일이 있고 나서 개미맨을 처음부터 재수정했고, 열심히 그림연습을 했습니다. 그러다 ‘열혈강호’의 양재현 작가님의 작품을 도울 일이 있었어요. 작업을 마치고 양재현 작가와 함께 출판사를 찾았는데 그 출판사에서 제 작품을 보자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출판된 작품이 개미맨이었습니다.”
운이 따랐다고 할까? 김태형 작가는 타인의 작업을 도와주다 발탁돼 자신의 작품 2개를 출판하게 된다. 물론 김태형 작가의 보이지 않는 노력과 실력이 있었기에 그에게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성공발판으로 삼을 수 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불신으로 잃어버린 기회, 새로운 시작의 기회로 삼았다
‘개미맨’ 이후 김태형 작가는 ‘레드블러드’를 출판해 유명작가 대열에 참여하게 된다. 이 때 그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 바로 미국 진출이다. 이 때 김태형 작가에게 모든 업무를 도맡아 해 주겠다는 에이전시가 등장했다.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 이 에이전시가 미국 진출의 기회를 앗아가게 된 것을.
“당시 미국 진출은 그리 흔하지 않은 기회였죠. 이 때 한 에이전시에서 저의 미국 진출을 적극 도와주겠다고 나섰습니다. 저는 의심의 여지 없이 그들을 믿었지만 결국 사기를 당하고 말았죠.”
▲ 개발사 내부에 마련된 침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 누워있었다 -_-;
하지만 김태형 작가는 여기서 좌절하지 않았다. 물론 뜻밖의 사건으로 좌절의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이 시간을 또 다른 시작으로 삼고 새로운 출발을 한 것이다.
“예전 하이텔에 만화 동아리가 있었습니다. 그 때 알고 지내던 친구 대부분이 게임 개발자가 돼 있더라고요. 워낙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사이라 서로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는데, 저의 작품 레드블러드를 온라인게임화 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말이 나왔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설립된 개발사가 현재 ‘레드블러드’를 개발하고 있는 고릴라바나나다. 이들은 예전부터 만화 동아리 활동을 하며 서로의 생각을 공유했다고 한다. 평소 생각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이 모두 비슷했던 지라 함께 게임을 개발하면 좋겠다고 생각만 해왔었는데, 김태형 작가의 사기사건(?)을 계기로 한데 뭉쳐 젊었을 때 가졌던 꿈을 실현한 것이다. 고릴라바나나의 정무식 PD도 이 때 알게 된 사이라고 한다.
▲ 이..이 분의 정체는..과연..-_-?
“물론 저의 사기 사건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 친구들과는 언젠가 함께 일하고 싶었었죠. 정말 고맙게도 친구들은 레드블러드가 가진 잠재력을 믿었고, 저 역시 그 친구들을 많이 믿고 의지했기 때문에 지금의 고릴라바나나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림에 생명을 불어 넣는 것? 게임이니까 가능한 일
“레드블러드 온라인을 개발하며 원작자의 욕심이라던가 고집은 모두 버리고 있습니다. 만화를 그릴 때는 제 자신만의 세계였지만, 지금은 게임을 개발하는 모두의 세계니까요.”
‘레드블러드’의 원작자로서 게임 개발의 의견 조율은 어떻게 이뤄지냐는 기자의 질문에 김태형 작가가 한 답변이다. 그는 원작자라고 해서 어떤 권위적인 위치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원작자로서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정말 사랑한다면 최대한 많은 가능성을 제시하고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더 좋게 만드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창조한 세계가 입체화 돼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제가 생각해 왔던 세계 안에서 3D화 된 캐릭터가 움직이는 것을 보면 정말 가슴이 벅찹니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요? 아무튼 정말 뿌듯하기도 하고 아쉬운 부분도 많습니다. 아무래도 평면적인 그림을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데 있어서 많은 제약이 따르죠. 그 때 발생하는 어색함을 최대한 없애고 수정하는 게 저희들이 일입니다.”
▲ 윗 사진의
정체는 바로 이 분!
고릴라바나나의 원로 멤버로 김태형 작가와는 동아리 때부터
알고 지냈다고.
그렇다면 김태형 작가는 앞으로 게임 개발에만 전념하고 만화가의 직업은 과거의 기억으로 두려는 것일까?
“만화는 제 인생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화를 그만 둔다는 건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하지만 지금 당장은 레드블러드 온라인에 몰두해서 게임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힘쓰고 싶네요.”
실제로 기자가 개발사를 방문했을 때도 김태형 작가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던 중이었고,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전체회의 참여를 위해 양해를 구하고 바로 자리를 떴다. 그만큼 게임 개발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 레드블러드 온라인 이미지
“지난 명인 인터뷰를 보니 모두 국내 만화시장이 죽고 있다는 이야기가 많더라고요. 부정적인 얘기는 하고 싶지 않지만 만화시장이 죽어가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주위에서는 웹툰이라던가 허영만 작가님을 예로 들며 꼭 단행본 발행만이 살길이 아니지 않느냐고 합니다. 하지만 웹툰은 접근이 매우 쉬운 라이트 만화고, 허영만 작가님 만화는 다소 무겁고 깊이를 지닌 만화입니다. 그리고 이 사이를 이어줄 수 있는 대중적인 만화는 어디로 간 것일까요? 90년대만 해더라도 참신한 만화들이 계속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사라진 상태죠.”
그럼에도 김태형 작가는 국내 만화시장의 잠재력이 아예 없다고 생각하지만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해서 국내 만화시장에서의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비록 만화시장은 죽어가는 상태지만, 게임이라는 새로운 통로를 통해 그림 자체는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후에는 레드블러드처럼 게임과 만화가 하나되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믿고 있고, 그렇게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입니다.”
그림과 게임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자 김태형 작가의 눈빛이 변했다. 그의 눈빛을 통해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을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또 그는 국내 원화가들에 대한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 게임메카를 위해 그림을 그려주시는 김태형 작가
▲ 김태형 작가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더라
“지난 시절을 봤을 때 현재 국내 원화가들의 그림들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다만 원화가들이 특정 업체에 들어갔을 때 업체에 대한 소속감 때문인지 소위 말하는 윗사람들의 압력 때문인지 자신들의 특징을 살리지는 못하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순박한 미소와 순수한 마음을 지닌 김태형 작가. 하지만 그 안에는 분명 세상의 부조리를 확실히 지적할 수 있는 날카로움을 갖고 있었다. 특히 게임과 만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만큼은 남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뿜어냈다. 그의 이러한 열정이 부디 국내 게임 계와 만화 계를 더욱 발전시키기를 기대하며 글을 마친다.
▲ ... 이거 돈이라도 드려야 하는건가..-_-;
▲ 남자 직원들만 있는 개발사임에도 무척 깔끔했다
▲ 오예~ 게임메카 최고~!!
▲ 레드블러드의 배경 원화가. 바탕화면 그림은 직접 그리신 그림이라고 한다
▲ 레드블러드 캐릭터 모션 담당. 왠지 인체 해골과 함께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
▲ 회의 때마다 해외 여행을 간다던 고릴라바나나 개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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