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그림자의 왕 바스티안 - 1장 앨먼딘(Almondine)
“넌 여기서 내려야 하지 않을까? 저 사람들에겐
당신이 무척이나 소중한 것 같은데.”
“어떻게
내려줄 생각인데?”
소녀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아….”
그제야 익셀은 자신이 완전히 이 소녀의 계획에 말려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성벽 위든 탑 위든, 그를 노리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성역을 더럽힌 살인자! 샤레티님을 내놔라!”
“저 녀석이 감히 샤레티님을!”
“마법사를 불러! 샤레티님을 구해야해!”
“안돼, 마법을 쓰면 샤레티님이 위험할 지도 몰라!”
아에데스 신전이 이토록 분노의 목소리로 가득 찬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을 것이다. 성벽과 탑만이 아니라 테라스 곳곳에도 무기를 든 병사들과 신관들이 나와서 소리치고 있다. 이런 가운데에서 소녀를 내려놓고 도망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흐음, 성역을 더럽힌 살인자라고?”
“내가 한 게 아니야.”
사람들의 외침을 듣고 소녀가 중얼거리자 익셀은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대답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건 말건 이 마당에서는 아무래도 좋은 일인데….
“뭐, 좋아. 지금은 내 말대로 따르도록 해. 그편이 너와 나, 둘 모두에게 이로울 테니까.”
별 것 아니라는 듯, 머리를 매만지며 소녀가 말했다.
“일단은 날 납치하는 것부터 해줘.”
“뭐?”
익셀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성역을 더럽힌 것만으로도 사형이야. 죄가 더 늘어난다 해서 해될 건 없지 않니?”
“그런 문제가…!”
“어차피 넌 여기서 날 내려주지 못해. 내 안전이 확인되자마자 마법사들이 공격을 시작할 거야.”
옳은 말이었다. 익셀이 입을 다물자 그녀는 멋대로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여러분 조용히 하세요. 비록 제가 이 무뢰한에게 잡힌 몸이지만 이 자도 인간인 이상 함부로 저를 해치려 하진 않을 거예요. 부탁이니 노성(怒聲)을 거두어주세요. 절 위험에 빠뜨리지 말아주세요. ”
“어, 어이….”
아직 익셀은 그녀의 계획에 동의한 것이 아니었지만 이미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에 직면하고 말았다. 아아, 정말로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일까? 신전을 더럽힌 살인자의 오명을 뒤집어 쓴데다가 이제는 억지로 납치까지 해야만 하다니!
“이제 됐지?”
‘되긴 뭐가 됐단 말이야?’
익셀은 생전 처음으로 참담함을 느끼고 있었다. 소녀의 말에 사방은 조용해 졌지만 그에 대한 살의가 가신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더욱 활활 불타올라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 속까지 따끔따끔한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이상하기도 했다. 이 소녀의 한마디에 신전 안의 모든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모두 소녀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다. 이 소녀가 대체 누구기에?
“어서 가자. 저 사람들이 협상이라도 요구하면 골치 아파지니까. 미리 말하겠는데 협상 같은 거 할 생각하지마. 저 사람들이 아무리 신전의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안전하다는 확신이 서면 당장 널 없애려 들 테니까. 신전은 죄인에겐 용서가 없는 법이야.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에겐 시간이 없어.”
“아아.”
한숨처럼 대답하고 익셀은 키루의 가죽끈을 잡아 당겼다. 그리고 아에데스 신전과 분노에 타오르는 시선들을 등지고 북쪽을 향하기 시작했다. 해가 막 서쪽을 향하는 때여서 하늘은 아름다운 장밋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당분간 신세 좀 질게. 난 샤레티 파리사라고해. 넌?”
“익셀.”
그는 짧게 대답하고 입 속으로 샤레티의 이름을 여러 번 굴려보았다.
샤레티 파리사.
그녀는 성(姓)을 가지고 있었다. 가문명(家門名)은 신분이 높은 사람이 가지는 것이었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것은 평소에 그와 그녀의 사이에 있는 보이지 않는 긴 거리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익셀과 함께 키루를 타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된 거지?’
익셀은 자신의 마음이 이상할 정도로 평온하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짧은 시간동안 겪고 싶지 않았던 많은 일들을 겼었다. 2년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것, 중죄인의 누명을 쓴 일, 쫓기길 계속하고…. 충분히 낙심할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어째서인지 익셀은 샤레티의 이름을 되뇌면서 자신이 비참하다는 생각은 눈곱만치도 하고 있지 않았다.
키루가 부드럽고 빠르게 날면서 아에데스 신전과 그 아래에 자리잡은 커다란 도시에 십자형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동안 그는 자신도 모르게 샤레티의 이름을 몇 번이나 되뇌고 있었다.
피리소리가 바람에 실려오는 봄의 기운을 더해주고 있었다.
가야 파리사가 아에데스, 백색의 성채의 도시 카펠라Capella에 들어섰을 때 지금까지 그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세상에 발을 들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가야에게 이 곳, 카펠라의 거리는 낯설고도 이질적이다. 분명 어릴 적에 어머니와 함께 이곳에 산 일이 있음에도 그는 이 곳의 모든 것이 자신과는 동떨어진 것처럼 느끼고 있었다. 마치 손을 내밀어도 닿지 않을 것 같았던 환상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 같은, 기억으로만 접해왔던 세계가 눈앞에 현실로 다가와 오히려 꿈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거리는 술 냄새와 음악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피리소리와 만돌린의 경쾌한 가락, 탬버린과 북 치는 소녀, 한 달에 한번 들어설까 말까한 유량 기예단. 카펠라는 축제 분위기였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있음에도 만취한 채 흥에 겨워 춤을 추는 사람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카펠라의, 아니 이 나라 전체에 있어 가장 경사스러운 일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카펠라는 처음 들른 여행자의 얼굴에도 자연스럽게 미소가 떠오를 정도로 흥겹고 즐거운 분위기였다.
며칠에 한번 시장이 들어서는 공터는 사람들과 상점으로 가득 메워져 있었고, 대륙에서 보기 힘든 바다 물고기나 산호와 조가비로 만들어진 장신구들을 늘어놓고 파는 행상인도 만날 수 있었다. 갖가지 진기한 구경거리에 아이들이 뛰어 다녔다.
‘즐거워 보이는 구나.’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거리의 정경을 바라보던 가야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문득 자신도 이 즐거운 축제에 동참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창 밖으로 내다보기보다는 땅을 직접 밟고 걷는다면 이곳의 존재를 더욱 실감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부턴 내려서 걸어갈게요. 괜찮아요.”
그는 마부에게 당부해서 마을의 입구 어귀에서 마차를 세웠다. 직접 생기 넘치는 거리를 밟아 싶었다는 그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한 마부는 석연치 않은 얼굴로 마차를 멈춰 그를 내려주고 다시 말에 채찍질했다.
“이 곳, 정말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가야는 바람에 헝클어진 엷은 앞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는 순례자와 같은 복장 덕에 현실과는 동떨어져 보이는 사람이었다. 행상인이나 여행자로 보기에는 그의 옷은 바람에도 거칠어지지 않았고 녹색 터번 아래의 얼굴은 태양 빛을 받지 않은 사람처럼 하얗다. 아직 성인이라고 할 수 없는 앳된 얼굴은 그가 지금까지 세상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살아왔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가야는 바람에 흐트러진 터번을 고쳐 묶으며 마을 뒤쪽으로 드리워진 순백의 성채를 돌아보았다. 마치 하나의 산처럼 우뚝 선 성채, 이 신성황국 엘마이어의 기둥이자 상징으로서 존재하는 앨먼딘(Almandine)이 보호받는 곳, 카펠라는 저 아에데스를 지키기 위한 도시인 지도 모른다.
봄날의 따스한 햇살이 그의 머리에 내리쬐는 가운데 그는 신전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제 2의 고향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가야에게는 깊은 의미를 가지는 장소였다. 그가 맨 처음 이곳을 떠났을 때는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애였다. 돌아온 지금, 카펠라의 거리에서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빛 바랜 종잇장처럼 그의 존재는 희미해져 있었고, 그를 선뜻 반겨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신전에는 오랫동안 만나보지 못했던 그의 사랑하는 사람들, 어리고 나약해서 보호만 받아왔던 자신이 이제부터는 지키고 싶은 그들이 있었다.
“아차, 형님과 누님에게 드릴 선물을 챙겨오는 건데…. 역시 너무 급하게 돌아온 건가? 그 때문에 덜렁거린다고 헤인에게도 잔소리를 들었고.”
가야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조금 덜렁거리는 성격 탓인지 컬리지(College)의 친구들도 그를 유난히 걱정해주었던 것이다. 헤인도 그가 출발하기 전에 특별히 걱정해주었던 친구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가야는 피식 웃음 지으며 절로 신이 나는 카펠라의 거리를 돌아보며 걷기 시작했다.
“신은 자신의 조각을 이 알리어스에 살고 있는 생명체에게 나누어주었단다. 그 조각들 가운데 하나가 이 신성황국 엘마이어의 앨먼딘이지. 신의 조각이 사람들 곁에 머무른다는 것은 신이 우리를 지켜주고 있다는 뜻이야. 이 엘마이어가 축복 받은 나라라는 증거란다.”
멀리서 온화한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들려왔다.
이야기꾼이라고 생각되는 목소리의 주인은 먼지를 풀풀 날리는 여행자 티가 났다. 어느 도시든 여행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전쟁이 잦았을 무렵 한곳에 정착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그때의 습관이 몸에 배었던 일부 사람들은 아예 방랑하는 생활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가야가 보기에 그도 그러한 부류의 사람 같았다.
“이야기꾼일까? 지금은 축제기간과도 같으니 있을 법하겠지만.”
가야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리를 가득 메우는 흥겨운 음악소리를 따라간 애들이 대부분이지만 이런 날에만 만날 수 있는 이야기꾼의 흥미로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아이들도 적지 않았다. 한 여자아이가 신기한 물건을 들고 있는 남자에게 이야기를 재촉하고 있었다.
“저 순백의 성채는 신의 은총을 담고 있는 그릇이란다. 오늘은 바로 그녀, 앨먼딘의 약혼이 거행되는 날이지. 신의 조각의 반려(伴侶)를 정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식중의 의식인 셈이야.”
아이들은 그의 말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의 말투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가야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와 아이들에게로 다가갔다. 그러나 그의 존재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 마리아, 이것을 뽑아보렴.”
그는 자신의 옷깃에서 어떤 것을 꺼내어 한 소녀에게 한 장을 골라보라고 시켰다. 소녀는 시키는 대로 한 장을 골라 뽑았다. 하얀 새를 가지고 흰옷을 입은 소녀의 모습이 새겨진 카드였다.
-파도도 바람도 거칠 것이 없습니다. 커다란 받침돌이 지탱해줄 것입니다. -
“그것이 너를 위해 준비된 행운이란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소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는 사람들의 행운을 말해주는 사람이었다. 가야는 대륙 내에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법사(Mage)는 아니지만 그 목소리에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들은 행복을 기원하고 행운의 말을 건네는 것이 그들의 일이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몰라도 그들은 방랑자의 길을 걸었고 끊임없이 알리어스 대륙 내를 떠돌았다. 거의 세상을 돌아다녀 본 일이 없는 가야는 책에서만 읽은 포츈텔러(fortuneteller)를 접하는 것이 처음이었기에 호기심이 동했다.
“앨먼딘님에게도 행운의 말을 선택해 주세요. 행복하도록 말이에요!”
한 소녀가 천진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그는 거침없는 미소를 띄웠다.
“한 사람의 기도는 커다란 힘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여럿의 기원은 큰 힘을 발휘한단다. 너의 마음은 반드시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거야.”
그는 음률이 담긴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면서 왼쪽 옆에 세워두었던 작은 하프의 줄을 퉁겼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듯한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맑은 소리가 났다. 가야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앨먼딘의 행운을 빌었다.
앨먼딘, 앨먼딘. 이 엘마이어에서 가장 신성시되는 존재.
신의 조각인 앨먼딘은 다른 신의 조각과는 달리 인간에게 깃들였다. 아에데스 신전에서 보호받고 있는 앨먼딘이 깃들인 소녀는 앨먼딘의 그릇이면서 곧 앨먼딘이이었다. 인간이면서 신의 일부를 품은 존재.
그녀가 영원히 행복해지기를, 가야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샤레티 파리사, 오늘은 그녀의 약혼식이 있는 날이었다. 그것은 엘마이어의 상징 앨먼딘으로서 정치적인 입장에서 주관되어지는 결혼일 것이다. 가야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단지 그녀가 어떤 의미에서든 행복해지기를 바랄 뿐이었다.
“오빠도 한 장 뽑아봐요!”
“맞아요!”
“뽑아봐요!”
아이들의 목소리에 가야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이들은 기대에 찬 모습으로 가야의 긴소매를 붙잡고 늘어지고 있었다.
“한 장 뽑아보시죠.”
아이들의 말에 이어 노래를 부르던 남자는 카드의 뒷부분을 내밀어 가야에게 한 장을 뽑을 것을 청했다. 얼떨결에 가야는 허리를 굽혀 그의 손안에 있는 카드들 중 한 장을 뽑아냈다. 어린아이들이 호기심에 찬 모습으로 그의 옆에 섰다. 가야가 뽑은 카드에는 낮과 밤이 함께 그려져 있었다. 태양과 달이 함께 공존하고 있는 불가사의한 상황이 담긴 그림이었다.
- 시작은 고되고 쓰지만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좋은 결과를 얻을 것입니다. -
가야가 뽑은 카드에는 그렇게 적혀있었다.
“제 카드는 불길함을 말하지 않습니다. 행운을 말할 뿐이죠.”
가야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매우 묘한 사람이었으나 포츈텔러가 본래 묘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대꾸는 하지 않았다. 가야는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갑자기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형제들이 그리워졌다. 어서 아에데스로 가자. 신전에 가면 그의 형제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컬리지에서 닦아온 미약한 힘이나마, 사랑하는 형제를 위해서 사용할 수 있다면, 가야는 지금까지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왔다. 비록 아직 실력은 미흡했지만 형제를 위한 마음만은 남다른 그다. 가야가 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을 때 하늘을 가르는 어떤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대륙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다이너스였다. 험한 산지에 살기 때문에 이런 곳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생물이었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것처럼 하늘을 가로질러 멀리 펼쳐진 평야를 향해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가야는 의구심이 들어 충동적으로 그것이 날아가는 방향을 향해 달려나갔다.
“당신에게 아스틸라의 행운이 함께 하시길.”
포츈텔러의 목소리가 봄기운을 실어 나르고 있었으나 가야에게는 그것이 들리지 않았다.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 1 리그 오브 레전드
- 2 발로란트
- 3 FC 온라인
- 41 로스트아크
- 51 메이플스토리
- 62 플레이어언노운스 배틀그라운드
- 7 서든어택
- 87 패스 오브 엑자일 2
- 9 메이플스토리 월드
- 102 오버워치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