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그림자의 왕 바스티안 - 1장 앨먼딘(Almondine)
전대미문의 사건
삐이이익!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맑은 하늘에 울려 퍼졌다. 계곡의 벽에 부딪혀 메아리처럼 되돌아오는 맑은 울림을 들으며 익셀은 그의 소중한 동료인 키루도 그것을 들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토시만 신고 있는 그의 발이 성벽의 하얀 바닥을 내딛었다. 돌에 부딪히는 눈부신 햇살. 눈이 시릴 정도로 하얀 돌바닥의 너머엔 까마득한 아래로 활기찬 도시와 하얀 강, 초록이 우거진 땅이 내려다 보였다. 그것은 아름답다 못해 장엄한 경관이었지만 아쉽게도 익셀에겐 그것을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그쪽으로 간다! 잡아!”
한 무리의 병사들이 내는 소음이 귓전을 울리자 익셀은 자세를 낮추고 더욱 속력을 내었다.
햇빛을 받아 금색으로 반짝이는 짧은 머리카락이 흰 얼굴과 붉은 자색 눈동자에 역동적인 그림자를 드리웠다. 검은 가죽옷과 미색 코트로 감싼 몸은 또래들보다 말라서 왜소해 보였지만 매우 날렵하게 움직였고, 손목과 발목에 방어구(防禦具) 대신 차고 있는 두터운 금속 팔찌는 무게가 상당했음에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가볍게 발을 디뎠다.
익셀은 병사들이 왜 자신을 쫓아오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흩날리는 긴 코트 자락의 선명한 검붉은 핏자국. 그 피는 익셀의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상처에서 뿜어져 나온 죄의 표식이었다.
‘제길, 어쩌다 이런 꼴이 되었지?’
익셀은 신성황국(神聖皇國) 엘마이어(Elmire)에서 가장 거대한 신전의 성벽 위를 달리며 탄식했지만 신전은 그의 조급한 마음엔 관심도 없다는 듯, 무심하게 자신의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백색의 신전, 아에데스(Aedhes).
이 신성하고 장엄한 장소는 본래 익셀과 같은 현상금 사냥꾼이 올만한 곳은 못되었다. 성직에 몸담고 있는 경건한 자들에게만 열려있는 공간이자 밖에서 보는 이들에겐 막연한 동경의 대상. 알리어스(Alius)대륙에 있어서 다시없을 지고의 보석을 간직한 장소. 원래대로라면 익셀이 이곳에 발을 들여놓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마우로 녀석, 하필이면 이런 데에서 죽다니!’
익셀은 속으로 불만을 토로하며 앞쪽에서 쏟아져 나오는 한 무리의 신관병사들을 피해 곁길로 뛰어 들었다. 마우로는 익셀이 쫓던 현상범으로 돈만 받으면 무슨 일이든 한다는 청부업자였다. 악랄한 수법으로 유명한 그의 죄목엔 몇몇 흉악한 사건들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에겐 상당한 액수의 현상금이 걸려있었다.
현상금사냥꾼인 익셀이 그를 타겟으로 지목한 것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다. 자그마치 2년. 그리고 비로소 그를 잡을 기회를 얻어 아에데스에 숨어든 것이 바로 얼마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그 2년간이나 노리던 먹이가 막판에 이런 식으로 초를 치다니!
비싼 값을 주고 마우로가 신전 안에 숨어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익셀은 구석진 신전의 예배당 안에서 마우로를 발견했다. 현상범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당신 목에 걸린 현상금을 받아야겠어, 마우로.”
익셀은 코트를 젖히고 허리춤에서 단검을 빼들었다. 서걱! 잘 갈린 날이 검집을 빠져나오는 소리가 조용한 예배당 안을 울렸다. 그 소리가 들렸을 텐 데도 마우로는 미동조차 없었다.
“찾는데 정말로 힘들었다고. 이런 깊은 곳에 처박혀 있다니, 기도라도 하는 거야?”
그래도 구원은 받고 싶은 모양이지? 익셀의 얼굴에 빈정거리는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상대방에게선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다른 놈들과는 반응이 좀 다른데?’
보통은 익셀의 어린 나이와 가냘프게 보이는 외모에 속아 욱하면서 덤벼들거나 빠져나갈 기회를 엿보는 경우가 많건만 그처럼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못들은 척 하며, 아니 정말로 듣지 못한 것처럼 제자리를 고수하고 있었다. 갑자기 익셀은 불안해졌다. 이 숨 막힐 듯한 정적은 어디서 오는 걸까? 사원의 정숙함 때문일까? 알 수 없는 기운이 날카롭게 피부를 찔러오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바로 그때 익셀은 마우로를 포기하고 도망쳤어야 했다. 그 감각은 위험신호였다. 하지만 마우로의 목에 걸린 현상금을 단념하기엔 그 액수와 그를 쫓던 지난 시간들이 너무나 아까웠다.
익셀은 단검을 겨눈 채 천천히 마우로에게 다가갔다. 도둑의 기술을 몸에 익힌 데다 토시만을 신고 있었기 때문에 거의 소리 없이 등 뒤까지 다가갈 수 있었다. 익셀은 마우로의 등에 단검의 날을 향한 채 속삭이듯이 말했다.
“일어서서 성벽으로 나가.”
그렇게 말한 것은 익셀이 이곳에서 피를 흘리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곳은 신성한 아에데스 신전이었고, 모든 성역이 그러하듯 아에데스도 피로 더렵혀져서는 안 된다는 규율이 있었다. 성역에서는 어떠한 범죄자라도 처형될 수 없었고, 불구지천의 원수를 만난다 하더라도 상대의 목숨을 앗아서는 안되었다. 성역에서 피를 흘리는 것은 곧 신에 대한 모독이었다. 마우로가 이곳에 숨어든 것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허튼 짓 할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어디 한군데가 부러지고 싶은 것은 아니겠지? 성역에서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는 계율은 있지만 팔을 부러뜨려서는 안 된다는 계율은 없으니까.”
그래도 마우로가 응답하지 않자 익셀은 그의 팔을 붙들었다. 그 순간 전율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적당한 반항이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손안에 닿는 느낌은 전혀 달랐다. 딱딱한, 나무토막과 같은 촉감. 그가 미처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마우로의 몸이 그를 향해 쓰러졌다.
“헉!”
고여있던 피가 흐르며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그리고 강하게 풍기는 죽음의 향기. 마우로는 이미 죽어있었다. 그의 얼굴에서부터 가슴팍에 흥건한 핏자국! 앉아있던 자리에도 진득한 피가 잔뜩 고여 있었다. 무엇보다도 심한 것은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마치 내부에서 폭발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코와 입에서 끊임없이 피를 흘리고 있는 얼굴은 죽는 순간의 공포와 두려움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익셀은 이제껏 그런 얼굴을 한 시체를 본 적이 없었다. 끔찍한 공포, 보는 순간 머리털이 곤두설 것만 같은 어떤 것을 본 사람의 얼굴.
익셀은 자신의 팔에 실린 시체를 내동댕이치고 황급히 일어섰다.
카랑!
오른 손에 들려있던 단검이 바닥에 부딪혀 날카롭게 울었지만 심장이 너무나 크게 쿵쾅거려서 그 소리를 들을 수조차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마우로가 어째서 이런 곳에서 죽어있는 거지? 그의 의문에 대한 대답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단 한가지만은 분명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이 죄를 그 자신이 뒤집어쓰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때 단검 소리를 들은 듯한 몇몇 사람들의 발소리가 문 밖에서 들려왔고, 익셀이 미처 몸을 피할 틈도 없이 벌컥 문이 열렸다.
“거기 누가 있소?”
‘아차!’
문을 열고 들어온 30대의 신관병사들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들의 눈에 비친 것이 무엇인지는 묻지 않아도 당연한 일이었다. 신성한 장소 안에 쓰러져 있는 시신, 그리고 피에 젖은 낯선 침입자.
“쳇!”
익셀은 그렇게 내뱉고 생각할 틈도 없이 신관병사들에게 달려들어 몸으로 밀어붙였다.
“으억!”
체구는 익셀 쪽이 훨씬 작았지만 불시의 습격이었던 탓에 병사들은 문밖에 나뒹굴었다. 익셀도 함께 넘어졌지만 그는 곧장 일어서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맙소사!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거야?’
심장소리가 아직도 귓속을 울리고 있었다. 뒤쪽에서 병사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감히 성전을 피로 더럽히다니! 신에 대한 모독이다!”
‘내가 죽인 게 아니야!’
하지만 그렇게 말을 한다고 해도 무슨 수로 저 사람들을 이해시킨단 말이지? 비록 그가 저지른 일이 아니었지만 익셀은 궁지에 몰린 상황이었고, 신관들과 병사들이 그의 변명을 믿어줄 확률은 극히 낮았다. 신전의 성벽을 달리며 익셀은 두어 번 더 휘파람을 불렀다. 자신이 점점 막다른 쪽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다른 길은 이미 병사들에 의해 포위되어 있었던 것이다.
“신의 앞에서 심판을! 저 자를 잡아라.”
추적자들의 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들렸다. 이제 곧 한계였다. 성벽은 곧 끝나고 더 이상 도망칠 구석은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성벽의 끝이 나타났다. 익셀은 발에 힘을 주고 멈춰 섰다. 그 바람에 작은 돌 조각이 떨어지며 까마득히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성벽 아래의 도시의 집들이 작게 오려낸 색종이처럼 보였다. 엄청난 높이다. 날개가 있는 생물이 아닌 한 떨어진다면 몸이 가루가 날 것이었다.
“여기까지다!”
익셀은 뒤를 돌아서자 금속으로 된 신관 병사들의 곤봉이 일제히 그를 겨누었다. 그때였다.
키이이이이-!
괴상한 짐승의 울음소리가 성벽 아래에서부터 들려왔다. 순간 익셀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키루!”
성 벽 아래에서 들리는 정겨운 소리는 그의 동료가 분명했다. 익셀은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성벽 아래를 향해 몸을 날렸다.
“어엇!”
그의 행동에 놀란 신관 병사 하나가 손을 내밀었지만 피 묻은 코트자락을 스쳤을 뿐. 익셀의 몸이 허공으로 던져졌다. 둥실하고 떠오르는 느낌도 잠시,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눈이 돌아갈 듯한 속도로 몸이 아래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까마득한 허공에서의 낙하는 현기증이 날 정도였지만 익셀은 두렵지 않았다. 그는 키루를 믿고 있었다. 갑자기 그의 등이 매끈하고 딱딱한 것에 부딪쳤다. 익숙한 감촉이었다. 익셀은 둥근 굴곡을 따라 몸이 미끄러져 내리기 전에 손을 뻗어 펄럭이는 가죽끈을 꽉 붙들었다.
“키루, 날아!”
키이이!
그의 명에 따라 깃털하나 없는 넓적한 날개를 펄럭이며 긴 목을 가진 거대한 생물이 고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다이너스(dynus-翼龍)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동시에 유선형을 그리는 머리와 뾰족한 입, 긴 목에 거대한 박쥐같은 날개를 가진 야수가 성벽위로 날아올랐다. 험난한 북쪽 산지에만 서식하는 다이너스, 쉽게 접할 수 없는 진기한 생물은 매끈한 검은머리를 위로 쳐들고 익셀이 다루는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도망치게 놔둘 순 없어!”
그들의 몸체가 성벽위로 떠오르자 한 용기 있는 병사가 곤봉을 들고 키루와 익셀을 향해 뛰어 들었다.
캉!
금속 곤봉을 손목에 차고 있던 금속팔찌로 막아내면서 익셀은 병사의 가슴팍을 세게 찼다. 온 힘을 다해 곤봉을 내려쳤기 때문에 막아낸 팔목이 저렸지만 단련이 되어서 참을 만 했다.
“으억!”
병사의 몸이 성벽의 동료들에게 떨어지자 키루는 좀더 높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미안.”
들렸으리라고 생각되진 않지만 익셀은 고개를 숙여 조그맣게 속삭이고 병사들의 손이 닿지 않을 높이까지 키루를 몰았다. 아에데스의 탑 위까지 도달하자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는 키루의 목을 두어 번 두드리면서 미소 지었다.
“덕분에 살았어. 제때에 와줘서 고마워, 키루.”
하지만 아직 안심할 때는 아니었다. 병사들은 따돌렸지만 마법공격을 받게 된다면 위험하다. 익셀은 아에데스 신전에 마법사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법사 자체가 매우 드물기 때문에 익셀은 제대로 된 마법사를 만나본 적이 없었지만 그들을 상대하는 것이 매우 위험하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다. 익셀에게 도둑의 기술을 가르쳐줬던 누님이 절대로 마법사를 적으로 돌리지 말라고 누누이 말할 정도가 아니었던가?
그들이 나타나기 전에 익셀은 북쪽으로 날기 위해 몸을 숙였다. 이제 곧 자신의 목에도 현상금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 몸을 숨기기 위해서는 역시 고향인 레인저(Ranger)의 마을, 그를 키워준 누님 부부가 있는 곳이 가장 적당할 것이다. 지도에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작은 마을이니까 추적자들도 거기까지는 따라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며 익셀은 가죽끈을 오른쪽으로 잡아당겼다.
키이이-!
키루가 몸을 튼 순간, 그는 갑자기 모든 생각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날개에 가려져 있던 신전의 탑이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성벽과 같이 햇살을 받아 흰색을 흩뿌리는 백색의 탑. 무심히 스쳐보던 익셀의 눈을 무언가가 사로잡았다. 탑의 꼭대기, 흰 색으로 부서지는 빛의 탑 위에 누군가가 있었다. 제의용 흰옷과 긴 검은 머리카락을 바람에 나부끼며.
소녀였다. 익셀의 또래, 아니면 약간 연상일까? 탑의 돌만큼이나 피부가 하얗다. 키루의 움직임에 따라 탑 위를 천천히 우회하면서 익셀은 그녀도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호수와 같이 새파란 눈동자와 마주치자 아찔한 느낌이 들었다. 익셀의 불길한 어두운 붉은 보라색 눈과는 달리 맑기 그지없는 빛깔은 고고히 흐르는 물을 닮아있었다. 햇살 속에서 이렇게나 투명하게 비치는 눈이 또 있을까?
입고있는 옷만큼이나 하얀 얼굴은 고귀해 보였고, 하얀 머리장식으로 꾸며진 흑단 같은 새까만 머리카락조차 어둠이 아닌 빛으로 싸여 있는 것만 같았다. 키워준 누님이 종종 칭찬하곤 했던 익셀의 금발조차 거기에 비하면 빛이 바랜 것만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무엇보다도 그녀에게는 범접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손을 대면 사라질 것 같은 환영 같은, 하지만 위엄에 가득 찬 그 분위기는 성스럽다는 말로도 부족한 감이 있었다.
익셀은 숨을 삼켰다.
‘마치 여신님 같아.’
“샤레티님!”
소녀는 등 뒤를 돌아보았다. 몇몇 사람들이 탑 위로 계단을 따라 숨이 턱까지 찰 정도로 달려서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난처한 소녀의 표정.
‘쫓기고 있어?’
익셀은 그렇게 중얼거리곤 곧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입고 있는 복장, 이름 뒤에 붙은 존칭, 신관 중에서도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이 신전에서 쫓길 이유가 있을까? 하지만 소녀는 그들의 모습에 목을 움츠리고 도망칠 구석을 찾는 것처럼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갑자기 그녀가 다시 익셀을 보았다. 그 순간 소녀의 눈이 묘한 빛을 발했다. 입가에는 보일락 말락 한 미소.
‘웃었어?’
익셀이 자신이 잘못 본 건가 눈을 깜빡였을 때, 소녀의 발이 한 걸음 크게 앞쪽을 내디뎠다.
“위험해!”
그것은 허공이었다. 익셀은 무의식중에 키루의 고삐를 당겨 아래로 향하고 최대한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 추락하는 소녀를 향해 팔을 길게 내뻗었다. 덥석 손목을 붙잡으며 소녀의 무게가 느껴졌다. 검은 머리카락이 물결친다.
“윽!”
익셀은 재차 고삐를 당겼다. 키루가 두어 번 날개를 퍼덕거리며 떠오르자 그는 이를 악물고 팔에 힘을 주며 소리쳤다.
“바보, 죽을 생각이야?”
“설마 그런 생각을 했을 것 같아?”
소녀의 반문에 익셀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손목을 잡힌 채 익셀을 올려다보는 소녀의 표정은 당돌하다 못해 오만하게까지 보였다. 절대로 죽을 사람의 얼굴은 아니었다. 마치 익셀이 구해줄 것이라는 것을 알고서 한 행동인 양. 아니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한쪽 입 꼬리를 올리고 자신만만하게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은 구해준 데에 대해 한치의 감사도 담고 있지 않았으니까.
“그대로 있지만 말고 좀 끌어 올려주지 않겠어?”
하는 수 없이 익셀은 그녀가 키루의 등위에 올라오도록 끌어올려 주었다.
“고마워.”
그것 또한 구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는 아니었다. 마차를 탈 때 손을 빌려주는 호위병에게 의례적으로 인사하는 것과 같은 어조였다. 멋대로 키루의 등위에서 치맛단을 정돈하는 소녀를 보며 익셀은 방금 전까지의 긴장함도 잊고 어찌하면 좋을지 머뭇거릴 따름이었다.
어쩌면 좋을지 모르는 것은 익셀만이 아니었다.
“큰일났다! 샤레티님이 침입자에게!”
“맙소사!”
탑 위의 사람들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굉장히 당황한 듯, 그 가운데엔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시녀의 모습도 보였다. 탑 위에서 외치는 소리에 성벽 위에 있던 병사들도 제각기 뭐라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거리가 멀어서 잘 들리진 않았지만 듣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대충 ‘신성모독에 살인도 모자라서 이젠 유괴까지 하는 못된 놈’ 운운이었을 것이 뻔했으므로. 더 심하면 심했지 낫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신전의 모든 사람이 성역을 피로 더럽혔다는 문제보다 이 소녀 하나의 일에 더더욱 분개하고 있다는 것은 의외였다. 하지만 그런 것도 당사자에겐 별일 아니었던 모양이다.
“뭐해, 어서 출발하지 않고?”
출발이라니? 익셀은 기가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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