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월 18일부터 22일까지 2차 테스트를 진행한 '창세기전 4'
‘창세기전 4’ 개발 소식을 접했을 때가 잊혀지지 않는다. 티저페이지에 올라온 짧은 문구만으로도 심장이 크게 뛰었다. ‘이것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이야기’, 이보다 더 창세기전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있을까? 90년대 한국 게임계의 부흥을 이끌고, 수많은 게이머들의 추억 속에 그야말로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 작품이니 말이다.
그러나 지난 4월,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창세기전 4’는 필자에게 쓰디쓴 실망만을 안겼다. 시대착오적인 그래픽과 모바일게임을 연상케 하는 얕은 게임성, 무엇보다 플레이가 어려울 정도의 불안정한 서버 환경이 치명적이었다. 어디까지나 1차 테스트임을 견지해야 함에도 단점만 눈에 들어왔다. 장장 14년간 쌓아 올린 기대가 너무나 컸던 탓이다.
돌이켜보면 정확히 뭘 기대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탄탄한 세계관을 적극 활용한 ‘파이널 판타지 14’급 정통 MMORPG? ‘실버 애로우’와 ‘다크 아머’ 연합이 각축을 벌이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능가하는 RvR? 혹은 ‘블레이드 앤 소울’ 이상의 미려한 그래픽? 어쩌면 그 전부일 것이다. 이건 ‘창세기전 4’니까. 나오기만 하면 국내 게임계를 평정할 전설적인 무엇이었으니까. 이 게임을 수식할 때 흔히 쓰이는 ‘왕의 귀환’이 바로 그런 의미 아니던가.
물론 이만치 개발이 진행된 게임을 ‘전부 갈아엎어!’는 그저 투정에 불과하다. 6개월 만에 다시 만난 ‘창세기전 4’는 전투 시스템을 조금 손보고, 그래픽과 서버환경을 개선하고, 예정된 콘텐츠를 투입했을 뿐이다. 이제는 정말 ‘낙장불입’인가보다. 따라서 여기서는 ‘창세기전’에 드리워진 거대한 기대감을 걷어내고, 있는 그대로 게임을 직시하고자 한다.
▲ 과연 14년의 기다림은 보상 받을까? '창세기전 4' 트레일러 (출처: 공식유튜브)
확산성 밀리언 흑태자를 꿈꾸다
‘창세기전 4’는 몇 년 전 국내 모바일게임 시장에 돌풍을 일으켰던 CCG(Collectible Card Game)와 놀랍도록 닮아있다. 전체적인 틀은 분명 MMORPG지만, 세부적인 시스템은 대부분 CCG에서 차용했다. 유저는 ‘크로노너츠’라는 일종의 시공간 여행자가 되어 온갖 시대를 방문하고, 당대의 영웅들을 말 그대로 ‘수집’한다.
이야기는 이러하다. ‘서풍의 광시곡’ 당시 제국의 악명 높은 감옥 ‘인페르노’에 갇혀있던 주인공은 갑작스레 난입한 ‘크로노너츠’들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이후 이들과 함께 시공간을 넘나드는 와중에 기존 역사가 점차 틀어지자, 원인을 추적해는 과정에서 여러 영웅들을 만나 동료로 삼게 된다.
▲ 인페르노 파옥 사건, 모든 것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 주인공을 구하러 온 시공간 여행자 '크로노너츠'들
다만 본래 시대에 있어야 할 영웅들을 여기저기 끌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니, 본인 대신 ‘영자’로 만든 복제품이 합류한다는 설정을 내세웠다. 덕분에 한 영웅을 여럿 소유할 수도 있고, 다른 영웅을 성장시키기 위한 재료로 갈아 넣거나, 아예 분해시키는 등 비인간적인(?) 처우가 가능하다. 말하자면 ‘확산성 밀리언 흑태자’랄까.
복제 영웅들은 적합한 시대에 가서 퀘스트나 던전 보상으로 얻거나, ‘영자 조합기’를 통해 무작위로 뽑을 수도 있다. 어떤 영웅은 소속 집단의 하위 영웅들을 모두 모으면 특전으로 주어지기도 한다. 각 영웅들은 당대의 활약상에 따라 커먼부터 언커먼, 레어, 에픽, 레전더리까지 5개 등급으로 나뉘는데, 당연히 등급이 높을수록 성능이 확연히 뛰어난 대신 입수에 애를 먹게 된다.
▲ 추억의 영웅들을 강화 재료로 갈아 넣고 분해까지
▲ CCG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뽑기 '영자 조합기'
이렇게 모은 복제 영웅들과 주인공으로 최대 5인 파티를 꾸려, 각종 퀘스트를 수주하고 스토리를 진행하는 것이 ‘창세기전 4’의 기본 골조다. 단, 파티 구성에 코스트 제한이 있기 때문에 마냥 비용이 높은 고등급 영웅으로 채워 넣을 수는 없다. 영웅 조합에 따라 ‘군진’이란 일종의 패시브 효과를 누릴 수 있는데,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군진을 편성하는 것이 요령이다.
이 밖에도 특정 영웅들을 모으면 소소한 서브 퀘스트가 발생한다든지, ‘각성’을 통해 추가 능력을 개방하는 일련의 구성은 CCG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추억의 영웅들을 분해하고 갈아버리는 시스템이 최선일 리는 없지만, 어쨌든 CCG와의 결합을 통해 ‘창세기전 올스타즈’라는 최소한의 목표에는 도달한 셈이다.
▲ 최대 5인으로 파티를 구성하고, 군진을 적용하는 것이 기본
▲ 동료들과 함께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은 MMORPG의 큰 틀을 따랐다
고등급 영웅이 지배하는 전장, 다양성은 어디로
‘창세기전 4’의 파티 시스템은 주인공 캐릭터를 조작하면 주변에 영웅들이 알아서 따라오는 방식이다. 개별적인 명령도 가능은 하지만, 일일이 행동을 지시하기엔 조작이 너무 난해하다. 문제는 그렇다고 다양한 단체명령이 지원되거나, AI가 알아서 유연하게 대처해주는 것도 아니란 것이다.
현재 게임에서 지원하는 명령어는 오직 단체 공격과 중지뿐이다. 따라서 적이 보이면 그저 우르르 몰려가서는 누가 먼저 쓰러지나 치고받는 것이 전부다. 초반에는 이런 막싸움이라도 상관없지만, 보스 몬스터가 장판형 공격을 퍼붓기 시작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단체 소산이 불가능하니 임요환급 컨트롤로 파티원들을 하나하나 대피시켜야만 한다.
▲ 보스 몬스터가 장판형 공격을 쓰면 좋든 싫든 개별 컨트롤을 해줘야 한다
여기에는 아주 간단한 해결책이 있다. 무조건 고강화 레전더리 영웅들을 앞세워 밀어붙이는 것이다. 실제로 테스트에 참여한 대부분의 유저가 이러한 정면돌파를 택했다. 애초에 섬세한 분대전투가 불가능한 구조이니 장판이든 뭐든 몸으로 받아낼 수 있는 조합이 각광받았다. 이에 따라 후반부로 갈수록 공격이면 공격, 방어면 방어 안 되는 것이 없는 레전더리 영웅들만이 선택하게 되고, 아무리 좋아하는 캐릭터라도 성능이 떨어지면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어떤 캐릭터든 애정을 가지고 키우면 강해진다!’같은 동화 속 얘기는 ‘창세기전 4’에 통하지 않는다. 고등급 영웅은 모든 면에서 현격히 뛰어나며, 호쾌한 필살기가 일품이다. 반면 커먼, 언커먼 영웅들은 일러스트와 모델링부터 볼품없는데다 타격감도 미비해 사실상 재료 이상의 가치가 없다. 그나마 기대를 걸었던 군진도 어차피 고등급 영웅이 지닌 쪽이 훨씬 유용하다.
▲ 적이 너무 강하다, 어떻게 할까? 정답: 시라노를 출동시킨다
정말 철저하게 CCG의 폐단을 답습한 셈이다. 마치 카드를 뽑으면 별이 몇 개 달렸나 보는 것처럼, 영웅을 얻으면 우선 능력치부터 보게 된다. 물론 더 강하고 멋진 영웅을 추구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저등급 영웅들로도 게임 진행은 가능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후반부로 갈수록 지나치게 높아지는 난이도와 영웅의 다양한 쓰임새를 막는 불편한 조작 때문에 저등급 영웅은 반강제적으로 탈락한다. 설령 열심히 강화를 한다 해도 등급까지 오르진 않으니 이 불행한 운명을 뒤집을 방도는 사실상 없다. 능력치에 연연하는 사이 추억이 깃든 ‘창세기전’의 인물들을 만난다는 설렘은 퇴색된다.
▲ 고등급 영웅이 지배하는 전장, 나머지는 버려질 운명이다
별을 딸 수 없는 올스타즈,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무작위로 캐릭터를 뽑고, 강화하고, 분해하는 것이 비단 CCG만의 특징은 아니다. 여러 스포츠게임에서도 선수를 종종 소모품처럼 취급한다. 골드카드 호날두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렸던가? 그럼에도 스포츠게임에서는 좋은 선수가 반드시 승리를 보장하진 않는다. 플레이어의 실력 여하나 전술구성에 따라 경기의 향방이 완전히 바뀐다.
이에 반해 CCG는 실력이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다. 오직 더 많이 결제를 하고, 더 운이 따라줘서 강한 카드를 손에 쥔 자만이 앞서갈 수 있다. 물론 무과금으로도 소소한 재미를 찾을 수 있고, 다채로운 일러스트를 감상하거나 스토리를 즐기는데 만족할 수도 있다. 그러나 휴대폰으로 짬짬이 즐기다가 부담 없이 덮어놓는 CCG와 달리 ‘창세기전 4’는 MMORPG다.
▲ 과연 정식서비스가 되어서도 이만한 진용을 꾸릴 수 있을까?
‘창세기전 4’가 ‘확산성 밀리언 흑태자’가 된 것이 마냥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분명 추억이 깃든 과거의 영웅들을 수집하고 감상하는 재미는 제대로 살렸다. 그러나 정식서비스가 되어서도 이번과 같은 호사를 누릴 수 있을까? 테스트에서는 매일 고등급 영웅을 선물로 받고, 영자 조합에 필요한 재료와 던전 입장을 위한 시간의 모래를 넉넉히 챙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원활한 테스트를 위한 일시적인 배려였을 뿐이다.
영자 조합기를 살펴보자. 재료를 많이 넣을수록 고등급 영웅이 나올 확률과 조합 비용이 올라가는데, 레전더리 확률 10%를 맞추려면 재료 2,000여 개와 3만 엘드에 달하는 거금이 필요하다. 심지어 별도의 가속제가 없다면 결과가 나오기까지 수시간을 기다려 한다. 반면에 해체 시에는 에픽 영웅을 갈아 넣어봐야 겨우 재료 40개가 나올 뿐이다. 과연 아무런 지원 없이도 이걸로 레전더리를 뽑을 수 있을까?
던전을 돌며 하위 영웅을 모아 상위 영웅을 획득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보상으로 주어지는 영웅이 특정 목록 중에서 무작위로 나오기 때문에 결국 운에 따라 기약 없는 반복 작업을 해야 한다. 이미 테스트에서부터 영웅 하나를 얻기 위해 몇 시간이고 같은 지역을 배회하는 유저들을 숱하게 볼 수 있었다.
▲ 메디치를 얻기 위한 장대한 '노가다'의 피라미드
▲ 던전 보상이라고 확정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획득 '가능'일 뿐
수많은 우려 속에도… “부디 좋은 게임이 되어야 한다”
‘창세기전 4’는 캐릭터 수집이 콘텐츠의 알파이자 오메가다. 만약 누군가 원하는 영웅을 전부 모았다면, 그 사람의 플레이는 거기서 끝난다. CCG는 계속 새로운 카드를 추가하며 생명을 연장할 수 있지만 ‘창세기전’에는 그만한 밑천이 없다. 모두가 원할만한 ‘흑태자’, ‘칼스’, ‘시라노’, ‘샤른호스트’, ‘살라딘’과 같은 영웅은 한정돼있다. 그렇다고 아무 캐릭터나 새로 만들어낼 수도 없는 노릇. 결국 이 게임은 유저들의 레전더리 획득을 최대한 저지해야 하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번 테스트에서 전투가 개선되고 그래픽이 볼만해졌다는 얘기는, 어디까지나 고등급 캐릭터를 기준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커먼, 언커먼 영웅들로 진행해야 하는 극초반의 무료함은 누구나가 공감할 만큼 심각하다. 그 과정이 지금보다 훨씬 더 길어진다고 상상해보라. 이름도 모를 ‘제피르 팰컨’ 부대원만이 한아름 쌓여가는 것이 과연 ‘창세기전’ 팬들의 바램일까.
‘창세기전 4’가 추구하는 바는 확실히 알겠다. MMORPG와 CCG의 결합이 좋은 의미로 ‘확산성 밀리언 흑태자’가 되길 바라지만, 지나치게 무작위성을 강조하는 모습에 우려가 떠나질 않는다. 그럼에도 14년간의 고이 간직해온 추억을 완전히 내버릴 수는 없다. 기대했던 그 모습이 아니더라도…
‘창세기전 4’ 리뷰에는 원작의 명대사를 인용하는 것이 관례인 듯 하여 필자도 마지막 감상은 이로써 갈음한다. “창세기전 4, 부디 좋은 게임이 되어야 한다”
▲ "부디 좋은 게임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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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이 가득한 게임을 사랑하는 꿈 많은 아저씨입니다. 좋은 작품과 여러분을 이어주는 징검다리가 되고 싶습니다. 아, 이것은 뱃살이 아니라 경험치 주머니입니다.orks@gamemec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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