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제일 싫어하는 게임 장르를 고르라면 망설임 없이 공포게임을 선택할 것이다. 특히 점프 스케어(갑작스럽게 등장해 놀라게 하는 공포 요소)에 몹시 약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목부터 ‘공포의 세계(World of Horror)’인 이 게임을 하게 된 이유는 러브크래프트와 코스믹 호러, 고대 신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깎여나가는 이성, 기괴한 풍경과 상상을 벗어난 미스터리는 선호하는 분야이기도 하다.
실제로 플레이해본 공포의 세계는 난도가 상당히 높고 튜토리얼이 불친절하지만, 미스터리와 로그라이크 RPG 요소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여기에 공포 만화가로 잘 알려진 이토 준지에 대한 오마주가 상당히 많이 등장했다. 흑백 도트로 묘사된 이토 준지 느낌 아트는 혐오스러우면서도 비상식적인 미스터리 사건 내용과 매우 잘 어울렸다.
게임 진행은 로그라이크 턴제 RPG, 괴물과 전투도 중요
공포의 세계는 로그라이크 어드벤처 턴제 RPG다. 플레이어는 캐릭터를 조작해 기묘한 사건을 조사하고 해결해야 한다. 게임당 4~5개 미스터리를 해결해야 하며, 이후 등대에서 시련을 거쳐 고대 신 기물을 제거하면 클리어다. 빠르게 진행한다면 30분 내외로 게임 하나를 완료할 수 있다.
플레이 캐릭터는 체력과 이성 수치를 가지며, 둘 중 하나가 0이 되면 패배한다. 게임 오버 조건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파멸’ 수치다. 지역을 조사하거나 능력치 체크에 실패하거나 휴식을 취해 시간이 흘러가면 파멸 수치가 올라간다. 파멸이 100%를 돌파하면 고대 신이 현신해 마을을 파괴한다. 즉 게임을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미스터리를 조사하면서 파멸, 이성, 체력을 적절히 관리해야 한다.
이런 자원 관리가 상당히 짜임새가 있고 난도가 높았다. 게임에는 TRPG나 고전 RPG처럼 행동을 선택하면 특정 능력치를 기준으로 성공과 실패 여부를 확률적으로 결정하는 시스템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바위에 올라간다’를 고르면 ‘힘’ 능력치를 기반으로 성공 여부가 결정되며, 능력치가 높을수록 성공 확률이 높다. 능력치 체크에 성공하면 정보를 얻지만, 실패하면 바위에서 떨어져 체력이 깎인다.
조사를 하다 보면 각종 적과 만난다. 괴물, 유령, 엘드리치 등 다양한 종류의 적은 체력, 이성, 파멸 대미지를 입힌다. 전투를 피해 도망칠 수도 있지만, 그러면 파멸 수치가 크게 증가한다. 적이나 이벤트가 대부분 무작위로 등장하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게임 오버 당하는 상황도 자주 발생한다. 예를 들어 연속으로 이성 대미지를 주는 적, 이성 감소 이벤트, 스킬 체크 실패로 단숨에 이성이 0이 되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다소 흥미로웠던 부분은 전투가 게임 진행에 사실상 필수라는 점이다. 등장 캐릭터들은 10대 학생이나 20대 청년들인데, 보기보다 출중한 전투력을 지녔다. 코스믹 호러 장르 특징인 마법과 주문도 사용할 수 있는데, 성능이 애매하고 이성이 깎이는 큰 단점이 있다. 그래서 주문은 물리 공격이 불가능한 유령에게 사용하고, 대부분은 재래식 무기로 적과 싸운다.
게임에는 권총, 샷건, 일본도 등 현실에서 강한 위력을 발휘하는 무기도 나오지만, 고급 장비여서 획득하기 어렵다. 실제로 주로 사용하는 무기는 스테이크 칼, 메스, 나무 몽둥이, 깨진 병 등으로 괴물과 싸우기에는 시원찮은 것들이다. 그런데도 캐릭터들은 저런 장비를 가지고 신기할 정도로 잘 싸운다. 특히 능력치를 올리면 스테이크 칼, 깨진 병, 맨주먹으로 각종 기괴한 괴물들을 때려눕히기에 ‘매 앞에 장사 없다’는 표현이 절로 떠올랐다.
게임을 시작할 때 고대 신, 캐릭터, 게임 난이도, 미스터리 등을 선택하거나 랜덤으로 배정할 수 있다. 이 중 플레이 경험을 가장 크게 바꾸는 것은 난이도였다. 쉬운 단계에서는 다양한 미스터리를 체험하는 재미가 강조된다. 체력, 이성, 파멸 관리가 쉽고, 전투도 순탄하다. 반면 어려운 단계에서는 모든 결정이 중요했다. 전투 한 번이 클리어 여부를 결정하고, 한 번의 실수나 능력치 체크 실패로 게임이 끝나기도 했다. 그래서 미스터리나 스토리보다 로그라이크 RPG 요소에 더 몰입할 수 있었다.
다양하게 준비된 기괴하고 뒷맛 찝찝한 미스터리
공포의 세계의 특징은 다양하고 기괴한 미스터리가 등장하고, 이를 해결해야 한다는 점이다. 모든 미스터리가 최소 2개, 최대 5개까지 서로 다른 결말을 가진다. 또 어떤 미스터리는 기본 배경 마을을 떠나 새로운 지역에서 벌어지기도 한다.
대부분 미스터리가 상당히 불쾌하고, 비인간적인 인신공양, 식인, 자살, 주술, 시체, 기생 등을 주요 소재로 다룬다. 그만큼 대부분 등장하는 적, 미스터리 내용, 스토리 등도 혐오와 공포를 불러온다. 대표적인 미스터리가 라멘의 비밀을 쫓는 것이다. 처음 등장하는 라멘 그림만 보면 맛있어 보이지만, 재료의 진상을 파악한 뒤에는 분명 같은 그림임에도 역겹게 느껴진다.
대부분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과정은 전혀 직관적이지 않고 예상 밖이다. 사실 이러한 부분이 게임에 대한 흥미를 유발했다. 대부분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사건이 진행되고, 엔딩은 항상 찝찝하다. 모든 사건들이 이상 현상과 연관된 만큼 일반적인 사건 전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결말 또한 상황이 악화되거나, 진상을 모르고 넘어가거나, 사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한 채 사실상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엔딩이 다양한 만큼 비교적 개운하게 문제를 해결하는 사례도 존재한다. 하지만 좋은 결말이 꼭 게임 진행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비밀 집단의 종교 의식을 멈추는 미스터리에서 마지막 전투를 승리하면 종교 단체를 완전히 퇴치할 수 있다. 다만 해당 보스가 엄청난 파멸 피해를 입혀 자칫 게임 오버가 될 수도 있기에 차라리 도망치는 것이 게임 클리어를 위해서는 더 효율적이었다. 물론 도망친다면 ‘그런 일은 없었다’고 주변 인물들이 말하는 매우 찝찝한 결말이 출력된다.
미스터리 해결에는 지식과 경험이 중요하다. 게임 내 능력치가 아니라, 플레이어의 지식과 경험이다. 만약 이전에 경험한 미스터리라면 퀘스트, 사건 전개, 범인, 진상 등 미리 정보를 가졌을 것이고, 사건 전개 양상도 유추할 수 있다. 어떤 사건에서는 다음 사건에 영향을 주거나 해결에 도움이 되는 아이템을 획득할 수도 있다. 만약 이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면 중요 아이템을 얻어도 이를 활용하지 못하거나, 실수로 잘못된 선택지를 고르고 큰 손해를 볼 수도 있다. 대표적인 예시가 진균 학자의 실종 사건으로, 보스 정체를 알지 못한다면 전투 돌입 시 큰 피해를 입는다.
물론 미스터리 해결에는 운도 매우 강하게 작용한다. 가장 황당했던 경험은 조부의 장례식 사건에서 겪었다. 특정 조건을 만족하면 해당 미스터리의 진정한 보스와 전투할 수 있다. 그런데 기자는 능력치가 매우 높았음에도 체크에 실패해 벽난로에 불을 못 붙였고, 진행이 막혔다. 운, 다양한 엔딩, 지식 등 능력에 따라 같은 미스터리도 다른 결말을 맺는 부분이 흥미로웠고, 반복적인 로그라이크 장르임에도 매판 새로운 경험이 가능했다.
또한 개인적인 취향으로 다소 찝찝한 결말, 그리고 어딘가 허무한 게임 클리어 멘트도 마음에 들었다. 코스믹 호러라는 장르와 고대 신이라는 소재는 인간이 인지하거나 대응할 수 없는 공포가 주제다. 그런 만큼 대부분 사건은 비정상적인 결론을 맞이할 수 밖에 없고, 애초에 이성을 유지한 채 미스터리를 해결것도 어렵다. 미스터리를 마치고 등대를 오르면 다소 허무하게 게임이 끝나지만, 로그라이크라는 반복적인 게임 시스템과 코스믹 호러 장르가 설득력을 부여한다.
고전 게임을 표방한 시스템과 이토 준지 풍 그래픽
공포의 세계는 그래픽부터 시스템까지 고전게임을 표방해 초심자를 위한 배려가 다소 부족하다. 게임 튜토리얼에 해당하는 ‘간 떨어지는 교내 가위 괴담’은 전투 이외 설명이 적어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오히려 쉬움 난이도에 해당하는 ‘방과 후 활동’을 시작하면 본격적으로 게임 설명이 등장해, 튜토리얼 미션이 도리어 방해가 되는 느낌도 들었다.
한편 고전게임 스타일의 흑백 화면은 불길한 게임 내용과 매우 잘 어우러졌다. 여기에 더해 진행 중 수많은 글리치, 깜빡임이 발생해 플레이어를 놀라게 만든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점프 스케어가 적은 편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냥 매 순간 기괴하고 공포스럽기 때문이다. 음악도 도트 게임에서 들을 수 있는 8비트 형식이었는데, 지나치게 음산해 꿈에 나올 정도였다.
캐릭터나 적 외형 등 게임 디자인은 이토 준지 오마주가 많다. 공포의 물고기, 두 얼굴의 미녀, 머리 없는 조각상, 송곳니 가득한 모델, 사이코 스토커 등 만화에 나온 괴물과 귀신들이 다수 등장한다.
또한 게임 전개 양상도 다소 이토 준지 작품 스타일과 닮았다. 일반적으로 현실에서 기괴하거나 상상을 벗어난 것을 발견하면 소스라치게 놀라며 도망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토 준지 작품에서는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거나 엽기적이다 싶을 정도로 겁 없이 다가가는 경우가 많다. 본 게임도 마찬가지로 기괴한 적을 발견하면 문답무용으로 싸움을 걸어버리고, 미스터리를 발견하면 용감히 조사해 해결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공포의 세계는 잘 만들어진 로그라이크 호러 RPG다. 능력치 체크 기반 시스템이나 턴제 전투 등 기본적인 RPG 시스템이 짜임새 있었다. 전투도 박진감 있었으며, 자원 관리 또한 난이도에 따라 상당히 빡빡해 몰입도가 높았다. 여기에 더해 다양하게 준비된 미스터리와 해결 양상은 매 판 새로운 경험을 선사했다. 다만 고전 게임을 표방한 나머지 게임 진행이 다소 불친절했다는 점은 흠이었다. 이토 준지 작품에서 많은 영감을 얻은 만큼 공포, 혐오스러운 아트, 불쾌한 주제를 싫어하는 플레이어에게는 추천할 수 없겠지만, 취향에 맞다면 이보다 재밌는 게임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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