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월드 오브 다크니스 IP 게임들이 다시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대표적으로 뱀파이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수사 스릴러 RPG ‘스완송’, 그리고 온라인 배틀로얄 게임 ‘블러드헌트’다. 두 게임은 현대 사회 이면에 존재하는 뱀파이어들의 암투를 다룬다는 점에서 어반 판타지 팬들의 많은 관심을 받고 있지만, 동시에 불안도 불러일으키고 있다. 올해 발매됐거나 발매 예정이었던 월드 오브 다크니스 IP 게임들이 이미 흥행에 실패하거나 연기됐는데, 앞으로 나올 게임들은 괜찮겠는가 하는 불안 말이다.
그 중에서도 단연 많은 게이머의 많은 실망과 안타까움을 샀던 건은 RPG ‘뱀파이어: 더 마스커레이드 – 블러드라인즈 2’ 발매 일정 백지화였다. 당초 2020년 3월 발매 예정에서 2021년으로 발매일을 한 번 연기했던 데다, 이미 2019 게임스컴 등 행사에서 데모 시연도 충분히 했고, DLC 계획이 포함된 예약판매까지 진행 중이었기에 충격은 더욱 컸다. 현재 블러드라인즈 2 발매일은 가늠하기 힘들다. 스팀에서도 발매일 미정(To Be Determined)으로 바뀌었다.
사정이 이렇게 된 데는 물론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그 중 가장 큰 문제는 IP 소유주이자 유통업체인 패러독스 인터랙티브의 의지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발매 예정일을 얼마 남기지 않은 상황에서 패러독스 인터랙티브 리드 내러티브 디자이너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퇴출을 요구했고, 더 나아가서 그로부터 몇 개월 후에는 아예 블러드라인즈 2 개발을 다른 업체로 이관했다. IP 소유주와 개발업체 사이에 내러티브를 두고 마찰이 있었던 정황이 보인다.
그렇다면 블러드라인즈 2, 그리고 월드 오브 다크니스에는 어떠한 내러티브 문제가 있었던 걸까? 이번 주에는 이렇듯 갑자기 내러티브 방향성을 이유로 풍파를 맞은 블러드라인즈 2와 그 원작 IP인 월드 오브 다크니스가 지난 몇 년 사이 어떤 문제를 겪었는지 짚어본다.
TRPG로 시작한 월드 오브 다크니스, 디지털 게임업계로 넘어온 후의 슬픈 방황
블러드라인즈 2를 개발하던 하드수트 랩은 발매 연기 문제가 불거의 2020년에 게임을 거의 완성한 채로 폴리싱(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게임 전반을 개선하는 작업) 중이었다. 그런데 그 해 7월, 하드수트 랩과 패러독스 인터랙티브는 그 해에 출시할 예정이던 블러드라인즈 2의 리드 내러티브 디자이너 브라이언 미토다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카아이 클루니를 갑작스레 퇴출했다. 그 직후인 8월엔 블러드라인즈 2 출시일을 이듬해인 2021년으로 연기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래도 당시는 하드수트 랩이 계속 개발을 이어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2021년 2월, 패러독스 인터랙티브는 블러드라인즈 2가 2021년 상반기 내 발매될 일은 없을 것이며, 개발업체도 하드수트 랩에서 다른 곳으로 변경된다고 발표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어서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퇴출된 브라이언 미토다는 내러티브 및 시나리오 작업에서 지연은 없었고 자신이 왜 해고된 건지 알 수 없다고 밝혔다.
얼핏 보면 2020년 중순에 갑자기 블러드라인즈 2 개발에 문제가 터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배경을 알고 보면 문제는 그보다 앞선 2018년 말 패러독스 인터랙티브에서 발생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월드 오브 다크니스 IP의 최근 몇 년 사이 변화를 조금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본래 월드 오브 다크니스는 TRPG를 전문적으로 개발하고 출판하는 화이트 울프라는 회사에서 만든 IP다. 화이트 울프는 월드 오브 다크니스 IP가 성장하자 디지털 게임 영역으로 진출을 시도했는데, 그 과정에서 2006년 MMORPG를 개발하기 위해 이브 온라인으로 유명한 CCP 게임즈와 합병했다.
그러나 월드 오브 다크니스 MMO 프로젝트는 큰 실패를 맛봐야 했다. 2012년으로 예정된 발매일은 기약 없이 지연됐고, 결국 2013년 적자를 감당하기 어려워진 CCP 게임즈는 120명에 달하는 직원을 해고해야 했다. 그러고도 이 프로젝트는 2년을 더 지속했지만 결국 2015년 취소됐다.
그리고 월드 오브 다크니스 MMO 프로젝트가 공식적으로 취소된 2015년, 한 회사가 CCP 게임즈에 IP 인수를 제안했다. 크루세이더 킹즈와 스텔라리스 시리즈로 유명한 스웨덴 게임 회사 패러독스 인터랙티브였다. 이 거래가 성사돼 월드 오브 다크니스 IP는 패러독스 인터랙티브 소유로 넘어갔다.
이후 패러독스 인터랙티브는 월드 오브 다크니스 IP를 되살리는 동시에 이 IP로 각종 디지털 게임과 보드게임 제작에 착수했다. CCP 게임즈에서 인수한 화이트 스튜디오를 산하 독립 스튜디오로 하여 월드 오브 다크니스의 한 갈래인 ‘뱀파이어: 더 마스커레이드’ TRPG를 새롭게 만들고, 자신들과 관계가 있는 여러 회사에 하청을 맡기거나 라이선스를 대여하는 식으로 뱀파이어: 더 마스커레이드 브랜드 게임을 만들게 한 것이다.
처음은 순조로워 보였다. 뱀파이어: 더 마스커레이드 5판 TRPG 발매와 함께 TCG와 보드게임이 출시됐다. 디지털 게임도 패러독스 인터랙티브가 지분의 30%를 소유한 하드수트 랩에서 개발하는 블러드라인즈 2를 필두로, ‘웨어울프: 디 아포칼립스 – 어스블러드’, ‘코테리즈 오브 뉴욕’ 등 다양한 티저가 공개됐다. 그런데 이 좋은 분위기에 월드 오브 다크니스 IP를 담당하는 패러독스 인터랙티브 산하 독립 스튜디오인 화이트 울프가 찬물을 끼얹었다.
체첸에서는 뱀파이어들이 동성애자를 수용소에 넣고 잡아먹는다고?
2018년, 화이트 울프 스튜디오가 뱀파이어: 더 마스커레이드의 확장 설정서 ‘카마릴라’를 공개하며 문제가 발생했다. 이 설정서는 월드 오브 다크니스에 등장하는 주요한 뱀파이어 조직인 카마릴라에 대한 설정을 다루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좀 기묘한 내용이 들어갔다. 체첸 공화국 수뇌부가 하급 뱀파이어들이고, 동성애자들을 잡아 수용소에 가둔 후 강제로 피를 빨아먹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당시 실제로 국제적인 문제가 되고 있던 체첸 동성애자 탄압 사건을 기묘하게 뒤튼 것이었다. 2017년, 뉴욕 타임즈는 체첸 공화국 독재자 대통령인 람잔 카디로프가 기관원들을 시켜 게이를 사냥해 수용소에 넣고 고문을 자행했다는 기사를 보도했다. 카디로프는 유선 인터뷰에서 체첸에는 게이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존재하지 않는 게이를 고문할 수도 없다는 황당한 답변을 했다. 그러나 실제로 수용소를 탈출한 이들이 수용소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인과 구타를 증언했다. 당시에 이 사건은 국제적으로 상당한 화제가 된 바 있다.
그러나, 현실의 민감한 문제를 성급하고 부주의하게 다룬 시도는 큰 여파로 돌아왔다. 우선 체첸 공화국 정부의 직접 항의가 있었다. 정부 인사들을 게이 피를 빨아먹고 사는 뱀파이어로 묘사한 것도 문제인데, 더 나아가 대통령 람잔 카디로프에 대한 개인 설정까지 넣었기 때문이다. 이 설정에서 카디로프는 묽은 피(Thin-blood) 뱀파이어로 등장한다. 묽은 피는 힘이 극도로 약한 대신 약점도 적은 되다 만 뱀파이어다. 그 덕분에 카디로프가 태양빛에 타 죽지 않고 활동할 수 있다는 설정이다.
반대편인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도 반발이 있었다. 살인과 고문에 의한 실제 피해자가 발생하고 있는 사건을 단순 유희용으로 분별없이 사용했다는 지적이었다. 당시 뉴스에는 체첸 게이 수용소에서 고문을 당해 턱 뼈가 부러져 티타늄 보강재를 턱에 박은 채 살게 된 사람, 가족이 수용된 뒤에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된 사람 등의 인터뷰가 전해진 바 있다. 그런데 체첸에서의 박해와 피해자들의 고통을 유희용 설정으로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냐는 이야기였다.
이에 2018년 말 패러독스 인터랙티브는 즉각 사과하며 문제 상황 개선을 약속했다. 그 일환으로 패러독스 인터랙티브는 독립 스튜디오였던 화이트 울프를 본사 흡수통합하고, 스튜디오 지도부를 교체했다. 또한 화이트 울프가 정상화될 때까지 한동안 직접 월드 오브 다크니스 상품을 개발하지 않을 것이며, 당분간 브랜드 매니지먼트만 수행하고 개발은 신뢰할 수 있는 협력업체들을 통해 수행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담당 스튜디오 해체와 함께 IP 관리에 공백이 생긴 것을 의미했다. 실제로 패러독스 인터랙티브는 TRPG 월드 오브 다크니스 개발을 대부분 외주로 전환했고, 그로 인해 출판 일정이 상당부분 지연되기도 했다. 정상화된 후에는 또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월드 오브 다크니스를 전담하던 화이트 울프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기존 협력업체에 변동이 생긴 것이다. 예컨대 협력업체 헌터스 엔터테인먼트는 2019년부터 월드 오브 다크니스 한 갈래인 웨어울프: 디 아포칼립스를 개발한다고 발표됐었지만, 2020년 갑자기 개발 라인에서 배제됐다.
이렇듯 월드 오브 다크니스 IP는 이른바 체첸 수용소 사건으로 풍파를 맞았고, 그 이후 새로운 브랜드 매니지먼트 방향성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몇몇 협력업체들도 휘말렸다. 비단 블러드라인즈 2만 개발 도중 개발사를 바꾼 게 아닌 셈이다. 패러독스 인터랙티브는 각 협력업체가 교체된 이유를 직접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화이트 울프 구조조정 이후 비슷한 시기 일어난 일들임을 감안하면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월드 오브 다크니스의 피할 수 없는 고민, 게임은 현실의 민감한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앞에서 언급한 체첸 수용소 사건으로 인한 화이트 울프 구조조정이 월드 오브 다크니스 IP의 내러티브 방향성에 영향을 주었다는 추측이 맞다면, 앞으로의 월드 오브 다크니스 게임들은 어떤 모습으로 나올까? 아예 현실의 민감한 사건을 다루지 않는 방향으로 갈까?
일단 패러독스 인터랙티브는 이 문제에 대해서 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월드 오브 다크니스는 현실 사회와 문화의 어두운 면을 다루는 게임이며, 앞으로도 실제 세상의 민감한 문제를 다루는 일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단 피해자가 받는 고통의 의미를 격하시키지 않게 주의하겠다고 했다.
월드 오브 다크니스는 초기부터 실제 세상에 존재하는 요소를 각색한 점으로 인기를 끌었다. 실제 역사적 인물이 뱀파이어가 됐거나, 역사적 사건 배후에 뱀파이어들의 음모가 있다는 식이었다. 지금도 뱀파이어: 더 마스커레이드는 최신 판본에 시카고 시장의 돌발 발언으로 2016년 올림픽 유치가 실패하면서 관광객의 피와 소비를 노리고 올림픽 특수에 투자한 지역 뱀파이어 사회가 타격을 입었다는 등, 실제 현대사를 상세한 수준으로 엮어 설정을 쓰고 있다.
문제는 민감한 부분들이다. 월드 오브 다크니스에서 뱀파이어는 성적 약탈자들로 묘사된다. 정체를 숨긴 뱀파이어가 사람을 유혹해 성적 관계를 맺으며 피를 빠는 연출이 잦다. 또한 인간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착취하기도 한다. 공직자, 사업가, 노조간부 등 사회적 명사에게 접근하여 세뇌해 끄나풀로 삼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그 대상이 되는 사람과 사건이 현실에 존재한다면, 그것도 실제 많은 사람의 이해관계와 사회적 가치가 걸린 일이라면 당연히 문제가 될 수 있다.
패러독스 인터랙티브가 고심 중인 문제는 바로 그 지점에 있는 듯하다. 현실 사회의 민감한 쟁점을 다루는 설정을 쓰면서도, 해당 사안을 가볍게 희화해서는 안 된다. 쉽지 않은 줄타기다. 그렇다고 이 줄타기를 포기할 수는 없다. 월드 오브 다크니스의 주요한 특징이 현실에 존재하는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의 문제를 외면한다는 것은 월드 오브 다크니스의 큰 특징을 포기한다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일단 최근 비공개 테스트 서비스를 시작한 블러드헌트는 이와 같은 내러티브 문제에서 한 발자국 물러선 모양새다. 블러드헌트는 프라하를 장악하고자 하는 두 뱀파이어 조직인 카마릴라와 아나크가 뒷골목에서 서로를 사냥한다는 내용이다. 플레이어는 두 조직 중 한 쪽에 속한 뱀파이어가 돼 골목의 민간인이나 다른 뱀파이어를 사냥해 힘을 기르고, 반대측 뱀파이어를 제한시간 내에 말살해야 한다. 그러지 못할 시 뱀파이어의 정체를 파악한 인간 특수부대가 지역을 봉쇄하게 된다.
반면 2020년 발매된 비주얼 노벨인 ‘섀도우즈 오브 뉴욕’은 인간일 때 폴란드 이민자 레즈비언이던 주인공이, 뱀파이어가 된 이후 카마릴라에서도 소수자 취급을 받는 클랜으로 겪는 사건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소수자성을 나름대로 조망하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 할 수 있겠다.
향후 발매될 블러드라인즈 2와 스완송의 경우는 공개된 내용이 적기에 어떤 내용을 주로 다루게 될 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둘 다 각국 수뇌부가 뱀파이어의 존재를 알게 되고, 민간에는 이를 숨긴 채 특수부대를 운용해 뱀파이어를 사냥하고 있다는 TRPG 최신판 설정을 배경으로 한다.
이렇듯 월드 오브 다크니스는 앞으로도 현실 사회의 문제를 다룰 것으로 보이지만, 특정한 개인이나 사건을 언급하는 데는 전보다는 조심스러워질 듯하다. 앞으로 월드 오브 다크니스가 현실의 심각한 문제를 얼마나 조심스럽고 세련되게 다룰 수 있을지 조금 더 지켜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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