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인디게임 개발사 로파이 게임즈가 만든 오픈월드 RPG '켄시'는 게이머 사이에서 익히 유명하다. 기자 역시 예전부터 이 게임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게이머 중에서도 특히 고급진 취향을 지닌 '인싸'이자 '선지자'들만이 즐긴다는 게임. 모든 걸 포기하고 자유도에 올인한 게임. 처음부터 팔과 다리 한 개씩 떼고 시작하는 게임. 주인공도 없고 목표도 없지만 계속 뭔가가 일어난다는 게임... 분명히 흥미롭긴 하지만 태생부터 비주류 게임을 좋아하는 '아싸'로서는 딱히 시작할 만한 계기가 없었다.
그러던 중, 지난 4일 켄시가 스마일게이트 스토브 인디에 입점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마침 최근 게임 가뭄에 시달리던 기자는 이 기회에 '인싸' 세계에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며 켄시 황무지를 기웃거려 봤다. 입장은 쉬웠다. 가격도 스토브 입점을 기념해 30% 할인 중이고, 한국어도 지원하니까. 그러나, 켄시의 세계는 아무것도 모르는 낯선 초보에게 너무나도 가혹했다.
2분 만에 죽다
게임을 시작하기 전, 기자가 알고 있는 것은 단 하나였다. 지난 2020년 2월, 게임메카 서형걸 기자가 작성한 켄시 한국어 지원 기사에 나온 게임 설명 문구 뿐이다.
"켄시는 검을 든 불량배들이 활보하는 무법 지대를 배경으로 한다. 플레이어는 자유롭게 게임 속 세계를 탐험하게 되는데, 식인종, 굶주린 도적단, 잔인한 노예상, 야생 짐승 등의 위협을 극복해야 한다. 로봇 공학, 도둑질, 공학, 의학, 무기 제조 등 다양한 기술을 배워 캐릭터를 육성할 수 있으며, 다양한 캐릭터를 모아 팀을 꾸려 전투를 수행하는 것도 가능하다. 아울러 자신만의 도시를 건설해 제국을 건설하거나, 자유로운 떠돌이의 삶을 만끽할 수도 있다. 캐릭터 건강 상태에 신경을 쓰는 것도 매우 중요한데, 과다 출혈이나 과로, 굶주림으로 죽거나 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 이거야! 게임이라면 이 정도의 자유도는 있어야지! 게임을 켜기도 전부터 엉덩이가 근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저 무법 세계에서 전설이 될 나의 모습이 절로 그려지는 듯 했다. 도적단을 퇴치하고, 식인종을 소탕하고, 요새를 세워 상인들을 지켜주고, 군대를 결성해 버릇 없는 옆 요새를 습격하는. 일명 류 장군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황무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없는 황금 왕관과 모피 망토, 번쩍이는 대검과 우람한 근육으로 무장한 멋진 지도자였다. 그리고 류 장군을 조작하는 이는 바로 나다!
게임을 시작하려고 하니, 시작 방식을 선택하란다. 대충 살펴보니 시작 조건을 설정하는 듯 한데, 장돌뱅이, 신성한 검, 대장의 아들 같은 비교적 쉬워 보이는 조건부터, 식인종 사냥꾼, 노예, 막장 등 하드코어 해 보이는 조건까지 꽤나 다양했다. 그 중 가장 처음 나오는 '방랑자' 설명을 보니, '가진 거라곤 약간의 돈, 바지 한 벌, 녹슨 검 뿐이며, 세상을 모험할 준비를 갓 마친 외로운 방랑자다. 이것이 우리 게임이 의도한 플레이 방식이다'라는 문구가 보인다. 그래, 제작자가 의도한 대로 플레이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 주저없이 방랑자를 골랐다.
캐릭터는 아무리 꾸며도 멋이 없었지만, 최대한 멋있게 꾸몄다. 아무래도 왕이 될 사람이니 위엄 넘치는 모습이어야 하지 않겠나. 게임 자체가 일반적인 미적 감각과는 거리가 먼 디자인이기에, 그럭저럭 괜찮게 꾸미는 데만 대략 20여분이 걸렸다. 자유도에 올인했다는 설명답게, 커스터마이징도 꽤나 섬세하긴 했지만 조작이 영 불편하다. 메뉴 이동에서 마우스 스크롤조차 지원하지 않으니까. 그래도 어찌저찌 멋쟁이 용사처럼 꾸며서 게임에 들어갔다. 그 와중 게임 로딩 화면을 보니 주요 세력을 약탈해 제복을 뺏어 입는 것이 꽤 좋은 변장 방법이라는 팁이 나온다. 흠, 인터레스팅.
그렇게 게임을 시작하자, 뭔가 폐허 같은 마을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인벤토리를 살펴보니 검과 누더기 외엔 아무 것도 없다. 옆을 보니 각종 도움말이 있는데, 음식이나 물을 먹지 못하면 죽는단다. 소지금은 1000원 뿐이고, 주변에 가게나 음식점도 눈에 띄지 않는다. 이대로 모험을 나가면 그저 죽으러 가는 것 같고, 뭔가 모험 준비를 마쳐야 할 듯 한데, 마침 저 멀리서 누가 하나 다가오고 있다.
자세히 보니, 옷도 제대로 갖춰 입고 있는 여행자다. 체격도 왜소하고 약해 보이는 것이 딱 나의 첫 번째 희생 제물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 살짝 뒤를 따라가며 간을 봤는데, 얼핏 봐도 체격차이가 상당하다. 얼른 처치하고 물건을 약탈해서 모험 준비를 마쳐 황무지 식인종들을 상대하자... 라는 생각으로 선제공격을 가했다. 선수필승이라지 않는가.
그렇게 전투가 시작됐다. 역시나 저 여행자는 약했다. 검을 휘두르는 속도도 영 느리고, 공격을 막는 것도 부실해서 피를 마구 흘린다. 그런데, 어째 피가 과하게 흐르는 것 같은데... 이거, 내 피 아냐? 알고 보니 저 여행자보다 더 부실한 건 바로 나였다. 그제서야 능력치를 확인해 보니, 무기 레벨은 1, 전투 레벨은 방어 2, 공격 1, 회피와 무술은 0이다. 심지어 무기도 제대로 된 검이 아니라 쇠뭉둥이...?
결국 먼저 땅에 누운건 나였고, 약해 보였던 상대는 "먼지나 쳐먹으며 뒤져라."라는 마지막 인사와 함께 그마저 가지고 있던 돈까지 털어갔다. 어떻게든 일어나려 했지만 가슴을 상당히 깊게 찔렸고,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그대로 정신이 멀어지더니... 결국 야무치보다도 꼴사나운 자세로 사망에 이르렀다. 커스터마이징 20분, 게임 시작 2분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매운 맛 뒤에는 더 매운 맛이 있었다
게임 하나를 너무나도 쉽게 말아먹고 나니, 머리가 멍해졌다. 대체 난 뭘 한거지? 생각해 보니 내 캐릭터는 허우대만 멀쩡했을 뿐, 실제로는 이제 갓 여행 준비를 마친 외로운 방랑자였을 뿐이었다. 사인을 판정내리자면 근거 없는 만용이다. 원펀맨의 킹이나 엔젤전설의 기타노처럼 외모에 걸맞는 행운과 포스를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닌 주제에, 외모 하나 믿고 다짜고짜 도시에서 살육을 자행했으니... 성공했더라도 그대로 경비대에게 쫒겨 죽었을 것이 자명하다.
첫 사망 후 느낀 점은, 켄시는 역시 만만치 않은 게임이라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이쯤에서 좀 더 나은 상황의 캐릭터를 선택해 다시 한 번 도전했겠지만 뭔가 심성이 삐뚤어져도 단단히 삐뚤어진 기자는 더 하드코어한 선택을 한다. 바로 노예다. 누군가의 노예가 되어 강제노역을 하며 세상을 파악한 후, 몰래 힘을 키운 뒤 탈출해서 복수하겠다는 장대한 계획이다. 저기 먼 인도에도 노예 출신 왕이 세운 왕조가 있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옛날 인도 배낭여행 때 만난 사기꾼을 본뜬 캐릭터를 생성해 봤다. 특이하게도 노예는 2인 캐릭터를 동시에 조작하는데, 아마 가혹한 현실을 서로 기대며 버티라는 뜻일 것이다.
게임을 시작하니 뭔가 채석장 같은 곳이 나오고, 저 멀리서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다. 아, 저기서 같이 일을 하면 되는거구나 싶어서 그쪽으로 향하는데, 어디선가 사람들이 달려오기 시작한다. 다 같이 자유롭게 일을 하는 건가 싶은데, 어쩐지 쫒아오는 사람들이 칼을 차고 있고, 이상한 말을 내뱉는다. "탈출한다아! 그들을 붙잡아!"
"아닙니다. 저는 일을 하러 가는 충실한 노예입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들은 들어주지 않았다. 다짜고짜 후드려 패더니 그대로 우리 둘을 쓰러뜨렸다. 한 명은 상처가 너무 심해서 거의 죽다시피 했지만, 나머지 한 명은 그나마 상태가 조금 나아서 틈을 노려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경비병들의 발걸음 속도는 한낱 노예보다 훨씬 빨랐다. 쫒아온 이들에게 다시 두들겨 맞고 땅바닥에 누워야만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노예 주제에 감히 자유롭게 움직인 벌을 받은 것이었다. 딱히 밖으로 나간 것도 아니고 작업장 내에서 움직였는데도 말이다. 그렇다. 이 게임의 노예는 자유로운 이동조차 눈치 봐 가며 해야 하는 불쌍한 존재였다. 다행히도 1회차 플레이에서의 진검승부 여행자와는 달리, 여기 경비병들은 나름 자비로웠다. 부상을 치료해 준 후 친절히 감옥에 데려다 놨으니 말이다. 비록 우리 사기꾼 닮은 친구는 의식불명 상태였지만, 치료가 적절했는지 곧 깨어났다.
이후에는 지겨운 노동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서 탈출을 시도해 봤지만, 곳곳에 CCTV라도 달려 있는 것인지 곧바로 저 멀리서 축지법 쓴 경비병이 와서 후려치고 치료하고 잡아가고 가둬놓는 장면이 계속됐다. 아, 그러고 보니 바로 윗 문단에 경비병들이 나름 자비로웠다고 말했는데 그거 취소한다. 얘네들, 상처는 대충 치료해주는데 정작 밥은 한 번도 주질 않는다. 안 그래도 실컷 얻어맞고 땡볕에 묶여 있느라 영양실조 상태인데, 밥도 안 주고 가둬놓다니!
결국 수 차례 위와 같은 장면이 반복된 후 사기꾼 닮은 캐릭터가 먼저 굶어죽었고 친구도 하루 후에 그 뒤를 따라갔다. 정말이지 시궁창 같은 결말이었다. 차라리 처음 잡혔을 때 다른 노예들에게 본보기라도 보여줄 겸 사형시키던가, 괜히 살려줘서 희망을 가지게 만들다니, 이 잔인함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으랴!
공부 없이는 안 된다고? 그래도 부딪히는 게 재미다
이쯤 되니 옆에서 뜯어말리기 시작했다. 제발 공부좀 하고 게임을 시작하라고 말이다. 그러나 진정한 게이머라면 사전 지식 없이 맨 몸으로 부딪혀 가며 게임을 파악해야 하는 것이 아니던가! 기자는 다시 캐릭터를 만들었다.
세 번째 캐릭터는 많이 타협해서 전설의 검을 손에 넣은 검사 '신성한 검'으로 시작했다. 아무래도 무력 면에서 노예는 물론 앞서 플레이한 방랑자보다도 훨씬 우월했다. 대충 마을을 살핀 뒤 황무지로 나갔는데, 거지처럼 보이는 인간 하나가 돌아다니길래 싸워 봤다. 이번엔 조금 우세를 점하는 듯 싶었는데, 갑자기 그 놈의 동료가 와서 합공을 펼쳤다. 전투 상황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는 스펙 싸움이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네 번째 캐릭터 역시 '신성한 검'이었다. 이번에는 쪽수에 당하지 않겠다며 동료가 있어 보이는 놈들은 건드리지도 않았다. 드넓은 필드를 10여분째 달리고 있는데 저 멀리서 뭔가 숫자 같은 게 보인다. 가까이 가 보니 동물 두 마리가 싸우고 있었다. 들개 같이 생긴 놈과 목이 짧은 기린 같은 놈이 싸우는데, 기린 같은 놈이 승리했다. 왠지 세 보이긴 했지만 싸우느라 지쳤을 것이므로 당차게 공격을 가했다. 기린은 셌고, 나는 또 땅에 누웠다.
다섯 번째 캐릭터는 왠지 귀공자 느낌이 날 것 같은 '대장의 아들'이었다. 어쩐지 계속 현실과 타협만 보는 것 같지만 넘어가자. 아무튼 대장의 아들이니까 뭔가 더 편할 것 같았지만 그런 건 없었다. 오히려 소지금도 없고 능력치도 모두 1인 것이 진검을 지니고 있다는 점만 빼면 딱히 방랑자와 비교해 나을 게 없어 보였다. 물이나 식량 없이 황무지에 나갈 순 없기에 이것저것 쓰레기를 주워다 근처 펍에 팔았다. 인벤토리 가득 잡동사니를 주웠지만, 팔아서 얻은 건 고작 밥 한 접시 뿐. 그 와중 식탁 위에 물이 있길래 Alt 키를 누르고 주웠더니 근처 용병들이 기다렸다는 듯 나를 공격했다. 하하하...
사실 이쯤 되니 내가 뭘 하고 있는지 혼돈이 오기 시작했다. 평균 생존시간은 고작 5~10분 남짓. 기술을 배우고 용병단을 꾸리고 샌드박스로 뭔가를 짓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죽고, 새로 시작하고, 죽고, 새로 시작하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그러나, 얻은 게 아예 없지는 않았다. 이렇게 몸으로 부딪히며 켄시 세계의 법칙을 조금씩 배워나갈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도둑질이나 자물쇠 따기 범죄는 남 몰래 해야 한다던가, 싸우는 사람이 있을 땐 일시정지를 누르고 두 명의 소속을 본 후 신중히 한쪽 편을 들어야 한다던가, 시체에서 노획하기, 잠행을 통해 슬금슬금 다가가기, 훔친 물건을 안전하게 판매하기 등 꽤나 다양한 지식을 배울 수 있었다.
실제로 켄시의 최대 매력은 몸으로 부딪혀 가며 지식을 습득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재미있게 구성됐다는 점이다. 아무것도 지정해주지 않는 세계에서 뭔가를 깨우친 후 시행했을 때의 성취감이란 다른 게임에서 흔히 느낄 수 없는 경험이다. 다른 사람들의 플레이를 보자 하니 정착지를 만들고 노예 사냥꾼들과 싸운다거나, 다른 세력과 우호 또는 적대관계를 형성한다거나, 잡혀서 노예가 된 동료를 구출하는 등 자신만의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스스로 만들어 가고 있다.
기자는 아직 켄시 세계에서 배울 점이 많다. 비록 몇 번씩 반복해 죽었지만, 그 경험을 바탕삼아 언젠가 이 세상에서 이름을 떨칠 존재가 될 것이다. 나만의 요새를 짓고, 용병들을 데리고 다니며 식인종을 소탕하고, 나아가 하이브를 털어버리는 날까지. 언제가 될 진 모르겠지만 차츰 나아지고 있다. 그 날이 온다면, 이 기행기도 좀 더 멋진 경험으로 잘 포장되지 않을까 싶다.
이 같은 경험을 살려서 스토브 게임 후기란에 뭔가 적어 보고 싶었지만, 아직 경험이 미천하므로 그것은 나중에 하기로 한다. 듣자 하니 공략 작성 이벤트를 통해 스토브 캐시 20만원이나 켄시 장패드, 켄시 의수 쿠션, 치킨 쿠폰 등을 준다고 하는데, 고인물 분들이라면 아마 손쉽게 타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이번 켄시 체험은 왠지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기 같았지만, 그 다리의 감촉이 은근히 매력적이라 계속 만지게 되는 그런 느낌이었다. 계속 이곳저곳 만지다 보면 배도 만지고, 등도 만지고, 코도 만지고, 꼬리도 만지면서 결국 코끼리 전체를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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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메카 취재팀장을 맡고 있습니다jong31@gamemec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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