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녀게임에도 다양성은 존재합니다. RPG, 퍼즐, 시뮬레이션, FPS, 레이싱 등 장르도 세분화 되어 있죠. 시대에 따라 변하기도 하는데요, 현재는 과거 주류를 이룬 연애 시뮬레이션보다는 글과 그림으로 이루어진 ‘비주얼노벨’ 장르가 대세로 떠오르고 있는 추세죠.
‘비주얼노벨’은 글과 그림만 잘 활용할 줄 안다면 누구나 완성도 높은 스토리를 게임에 담아낼 수 있기 때문에 미소녀게임 업계에서도 크게 각광을 받았습니다. 다만, 장르적 특성이 명확하고, 노력을 들일 수 있는 부분이 한정되어, 비슷한 류의 작품이 많고 눈에 띄는 수작은 찾아보기 힘들죠.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게임은 이런 ‘비주얼노벨’의 연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 받는 타입문의 미소녀게임 ‘마법사의 밤’입니다.
▲ '마법사의 밤' 타이틀 이미지 (사진출처: 공식 웹사이트)
흡혈귀, 마술사, 이능으로 가득한 고유한 세계관을 그리다, 타입문
‘마법사의 밤’은 지난 2012년에 발매된 타입문의 비주얼노벨 게임입니다. 제작사인 타입문은 1999년 만들어진 동인 게임 제작 서클로 시작한 개발사인데요. 대표작으로는 여러분도 익히 잘 아실 ‘월희’와 ‘가월십야’ 그리고 ‘페이트/스테이 나이트’ 등이 있습니다.
처음 서클 시절만해도 타입문은 ‘월희’만 발매하고 해산하려고 한 프로젝트 팀 성향이 강했는데요. 당시 원화 담당인 타케우치 타카시와 시나리오 담당 나스 키노코가 게임 제작에 재미를 붙이면서 그 활동을 꾸준히 이어나가죠. 이후, 동인게임 ‘월희’의 인기에 힘입어 이들은 정식 개발사를 차리게 되고, 나중에는 ‘페이트/스테이 나이트’까지 발매하며 굴지의 미소녀게임 회사로 업계에 자리 잡습니다.
▲ '월희'로 시작해서...(사진출처: 필자 촬영)
▲ '페이트' 시리즈로 정점을 찍은 타입문 (사진출처: 필자 촬영)
타입문에서 만든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하나의 거대한 판타지 세계관을 내세운다는 것입니다. ‘월희’에서는 흡혈귀와 관련된 이야기를, ‘페이트/스테이 나이트’에서는 영령을 소환해 싸우는 마술사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등 소재부터가 확연히 다르지만, 그 설정은 세계관 내에서 엄연히 공유되고 있죠. 그래서 그런지 한 캐릭터가 여러 작품에 언급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오늘 소개할 '마법사의 밤' 역시 연결된 세계관을 잘 보여주는 예시라고 볼 수 있죠.
시골 소년과 마술사 소녀의 기묘한 이야기, 마법사의 밤
‘마법사의 밤’은 타입문의 시나리오 담당인 나스 키노코가 무명이던 80년대에 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인데요. ‘월희’에서 등장한 후, 다른 작품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마법사 ‘아오자키 아오코’의 어린 시절을 조명해 팬들의 큰 관심을 받았죠.
스토리는 오랜 시간 산에서 생활하다가 도시로 상경한 시골 소년 ‘시즈키 소쥬로’가 마술사로 한참 역량을 키워나가던 소녀 ‘아오자키 아오코’를 우연히 만나면서 시작됩니다. 그녀가 마술을 부리는 모습을 목격한 그는 “도시에 사는 인간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지만, 그녀 입장에서는 꽁꽁 숨겨야 할 정체가 들통나버린 절체절명의 위기였죠. 이에 그녀는 동료 마술사 ‘쿠온지 아리스’의 설득에 따라, 그를 제거하기로 결심합니다.
▲ 내용은 살벌하지만, 전형적인 보이밋츠걸 스토리다 (사진출처: 필자 촬영)
일단 보기에는 살벌하지만, 스토리는 의외로 전형적인 ‘보이밋츠걸(Boy Meets Girl)’ 구도를 따릅니다. 남녀의 우연한 만남,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둘을 서로 가까워지고, 나중에는 호감을 느끼는 단계에 이르죠. 어떤 의미로, 전작 ‘공의 경계’와 ‘월희’ 그리고 ‘페이트/스테이 나이트’ 등에서 보던 스토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전반적인 스토리는 좀 평이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래도 전투 장면에 대해서는 기존작과 확실한 차별화를 두고 있습니다. ‘월희’와 ‘페이트/스테이 나이트’가 박진감 넘치는 근거리 전투를 다뤘다면, 이번 ‘마법사의 밤’은 세계관에서도 많이 다루지 않는 마술 대결에 초점을 맞추고 있죠. 그래서 전투도 화려한 액션을 묘사하기보다는, 기묘한 마술과 서로 수를 파악하는 두뇌 대결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 무기를 들고 펼치는 화끈한 대전보다는...(사진출처: 필자 촬영)
▲ 마술 대결다운 수 싸움이 주로 펼쳐진다 (사진출처: 필자 촬영)
극대화된 연출로 애니메이션, 한 편의 마술이다
글과 그림으로 대부분의 스토리를 전달하는 비주얼노벨 특성상, 각 스토리 장면의 연출은 무엇보다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개발사마다 캐릭터 CG를 원근 배치하거나, 장면마다 다른 명암을 집어넣는 등 나름 창의적인 연출을 고안하기도 했죠. 그러나 ‘마법사의 밤’에서 보여주는 연출은 이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일반적으로 비주얼노벨은 글과 그림을 이용하기에, 다소 정적인 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다양한 기법의 연출을 더한다고 한들, 멈춰있는 그림을 보고 글을 읽는다는 느낌은 크게 변하질 않죠. 하지만 ‘마법사의 밤’은 그 틀을 따르는 대신, 극한의 연출력으로 그 한계를 넘었습니다.
▲ '마법사의 밤' 플레이 영상 (영상출처: 필자 촬영)
실제로 게임은 단순히 CG만 나열된 느낌이 아니라, 마치 한 편의 애니메이션처럼 장면을 하나로 쭉 이어보는 느낌을 줍니다. 특히 대부분의 CG에 움직임을 집어넣어, 그 모습은 흡사 다양한 게임 CG로 유저들이 하나의 영상으로 묶어내던 ‘매드무비’를 연상하게 만들 정도죠. 극적인 장면 전환도 잘 이루어지는 편이라, 시시각각 분위기가 급변하는 ‘마술 대결’이라는 콘셉과도 잘 맞아 떨어집니다.
▲ 상당히 동적인 CG가 많아, 애니메이션 같은 느낌을 준다 (사진출처: 필자 촬영)
▲ 적절한 이벤트 CG가 화룡점정을 찍는다 (사진출처: 필자 촬영)
여기에 틈틈이 들어간 고품질의 이벤트 CG도 한몫을 톡톡히 합니다. 사실 캐릭터와 배경 CG의 조합만으로도 이미 웬만한 작품을 뛰어넘는 동적인 연출을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모든 장면을 연출력만으로 처리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마법사의 밤’은 이벤트 CG를 남발하지 않고 적절한 부분에 사용해, 장면의 분위기를 제대로 끌어냅니다.
피나는 노력의 산물... 의외로 한계도 명확했다
사실 타입문은 업계에서도 비주얼노벨을 논할 때 빠지지 않을 정도로 위상이 높고, 개발 노하우도 이미 여러 작품을 거치며 많이 쌓인 편입니다. 그럼에도 ‘마법사의 밤’ 개발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시나리오 담당인 나스 키노코가 이후 이어질 ‘마법사의 밤’ 후속편에서는 1편 수준의 연출을 다시 시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밝힐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개발진 전원의 피나는 노력을 들여가며 완성한 산물이 되는 셈이죠.
물론, 그만한 노력이 들어가서 그런지 부작용도 명확했습니다. 바로 분량이 현저히 적다는 것이었죠. 연출에 각별한 신경을 쓰면서 개발 일정은 수년간 연기되었고, 이와 함께 시나리오 분량도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는데요. 그 분량이 일반적인 미소녀게임에 비하면 절반 수준이라 당시 많은 게이머들에게 질타를 받고 말았습니다.
▲ 의외로 분량이 그리 많지는 않다 (사진출처: 필자 촬영)
이처럼 단점도 있지만, 그럼에도 ‘마법사의 밤’이 비주얼노벨 장르에 한 획을 그은 연출을 보여주었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이를 뛰어넘는 작품이 나올 거라고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인데요. 그래도 매번 기대를 뛰어넘는 작품이 나왔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언젠가 “‘마법사의 밤’은 이 작품에 비하면 별 것 아니야”라고 평할 만큼 혁신적인 연출을 보여주는 작품이 다시 한 번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날이 빨리 오기를 바라며, 이번 미소녀메카를 마칩니다.
▲ 후속작에도 내심 기대를 걸어본다 (사진출처: 필자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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