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는 단순히 옷이나 물건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미소녀게임 업계에도 브랜드 이미지라는 것이 존재하죠. 실제로 과거 미소녀메카에서 소개했었던 엘프(elf)의 자회사 실키즈의 경우, 실키즈와 실키즈 사쿠라, 실키즈 와사비라는 3개 브랜드 계열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어차피 같은 미소녀게임 개발사인데, 왜 굳이 브랜드 네임을 따로 사용해 전력을 분산시키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미소녀게임은 ‘이미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의류 브랜드에서 따로 제품 라인을 론칭하듯 계열사를 따로 설립해 차별화된 브랜드 전략을 전개하는거죠.
예를 들어 ‘에어(Air)’로 유명한 key가 신작으로 발매했다고 하면 대부분 유저는 ‘에어’와 마찬가지로 시나리오 분량이 많고 눈물을 쏙 빼는 이야기를 갖춘 비주얼노벨이라 생각합니다. ‘에어’가 큰 성공을 거둔 타이틀이기도 하지만, key는 설립 초기부터 비슷한 성향의 게임을 발매해 확고한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죠. 유저들은 그 ‘브랜드’를 믿고 게임을 구매하는 겁니다.
그런데 간혹 본래 브랜드 이미지와는 다른 스타일의 게임을 느닷없이 발매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종의 실험작인 셈이죠. 이런 작품들은 대부분 큰 성공은 거두지 못하지만 가끔 저조한 성적이 아쉬울 정도로 완성도가 좋은 타이틀도 종종 나옵니다.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예익의 유스티아’가 바로 그런 작품입니다.
▲ '예익의 유스티아' 메인 화면 (사진출처: 공식 홈페이지)
▲ '예익의 유스티아' 메인 화면 (사진출처: 공식 홈페이지)
모에 계열에 강한 개발사, 오거스트
‘예익의 유스티아’는 오거스트(August)라는 개발사에서 만든 미소녀게임입니다. 오거스트는하즈키라는 회사에 소속된 미소녀게임 브랜드로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의 제작사 타입문처럼 동인서클로 시작해 기업까지 발전했습니다. 대표작은 ‘새벽녘보다 유리색인’, ‘달은 동쪽으로 해는 서쪽으로’와 최신작 ‘대도서관의 양치기’등이 있습니다.
▲ 오거스트의 대표 타이틀 (사진출처: 공식 홈페이지)
▲ 오거스트의 대표 타이틀 (사진출처: 공식 홈페이지)
오거스트는 팬들 사이에서 전속 원화가 ‘벳칸코’의 그림으로 잘 알려져 있죠. 커다란 눈망울을 지닌 미소녀 캐릭터를 중심으로 가볍고 이해하기 쉬운 '모에' 계열 작품을 주로 내놨습니다. 위에서 설명한 대표작도 모두 비슷한 스타일이죠. 다양한 스타일의 예쁜 캐릭터, 루트별 공략, 그리고 밝고 명랑한 분위기의 시나리오까지.
그런 성향이 벳칸코의 원화와 잘 맞아떨어져서 일본은 물론 해외에도 상당한 팬층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미소녀게임 전문 브랜드치고는 나름 대형이죠. 대부분의 작품은 발매 후 소설, 만화,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분야로 진출하며 PSP용 게임으로도 따로 발매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2011년 실험작 ‘예익의 유스티아’를 발매하면서 기존 팬들에게 충격을 줬죠.
▲ 모에 계열 화풍인데... 배경이 몹시 어둡다
▲ 저렇게 똘망한 눈매로 슬픈 표정을 짓다니
▲ 모에 계열 화풍인데... 배경이 몹시 어둡다
▲ 저렇게 똘망한 눈매로 슬픈 표정을 짓다니
캐릭터 공략보다는 시나리오에 무게를 둔 ‘예익의 유스티아’
기존 팬들이 ‘예익의 유스티아’를 접하고 충격을 받았던 이유는 지금까지 오거스트 작품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스타일이기 때문입니다. 원화는 대표작과 비슷한 분위기지만 시나리오는 상당히 무겁고 슬프며, 다크 판타지 세계관을 배경으로 하죠. 밝은 게임으로 승부했던 오거스트가 무겁고, 어두운 시나리오를 앞세운 것입니다.
게임 배경은 공중에 떠 있는 대지에 세운 국가 ‘노바스 아이텔’입니다. 이 국가의 거주 지역은 계급에 따라 상층, 하층, 감옥(슬럼가)으로 나누어집니다. 계급 상승 없이는 거주 지역을 절대 이동할 수 없지요. 게임은 거주 지역 중 슬럼가인 감옥을 주요 무대로 하며 차별 대우를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정치적 암투를 다룹니다. 세계관이 이렇다보니 이야기도 어두울 수 밖에 없지요.
▲ 그림은 귀여울지 모르지만...
▲ 그림은 귀여울지 모르지만...
노바스 아이텔에는 ‘우화병’이라는 질병이 있습니다. 이 병에 걸리면 등에서 날개가 돋아나요. 주인공 ‘카임’이 만나는 메인 히로인 ‘유스티아’도 이 병에 걸렸습니다. 처음에 단순한 전염병처럼 치부되지만, 게임을 계속 진행하면 ‘우화병’이 유행하는 원인이 밝혀집니다. 노바스 아이텔이 공중에 떠 있을 수 있는 건 수백 년 전에 천사를 잡아 숙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나고 천사의 힘이 떨어지자, 일부러 ‘우화병’을 퍼트려 새로운 숙주를 찾으려 했던 거죠.
진실을 밝히는 과정에서 주인공 ‘카임’은 상층에 거주하는 높은 계급의 사람들과 부딪히게 됩니다. 게다가 마지막에는 큰 비중을 차지했던 메인 히로인이 국가의 몰락을 막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기까지 합니다. 알콩달콩한 연애담을 볼 수 있었던 전작과는 굉장히 다르죠.
▲ (좌측부터) 피오네, 에리스, 코렛트, 리시아, 유스티아 순으로 루트가 고정되어 있다
▲ (좌측부터) 피오네, 에리스, 코렛트, 리시아, 유스티아 순으로 루트가 고정되어 있다
기존에 출시된 오거스트의 게임과 가장 큰 차이점은 히로인을 루트별로 공략할 수 없다는 겁니다. 본래 오거스트 게임들은 주인공과 히로인의 관계 발전을 주로 묘사했기 때문에 선택지를 이용해 플레이어가 공략하고 싶은 히로인을 고를 수 있었죠.
그러나 ‘예익의 유스티아’에서는 각 히로인 개별 루트 시나리오를 줄이고 메인 시나리오 비중을 크게 높였습니다. 그래서 공략할 수 있는 히로인 순서가 정해져 있습니죠. 플레이어는 시나리오 상 정해져 있는 공략 순서를 따라가며 히로인을 만나야 하기 때문에, 원하는 히로인을 따로 공략하는 재미를 느낄 수는 없습니다.
▲ 카임 아스트레아
▲ 유스티아 아스트레아
▲ 에리스 플로랄리아
▲ 성녀 일레느
▲ 리시아 드 노바스 유리
▲ 피오네 실바리아
▲ 지크프리드 그라도
▲ 루키우스 디스 밀레일
▲ 카임 아스트레아
본래 하층민이었으나,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고 감옥으로 떨어진 주인공
이 후 감옥을 총괄하는 조직의 암살자로 길러졌다
▲ 유스티아 아스트레아
매춘부들이 탄 마차에서 카임이 발견한 소녀로, '우화병'에 걸린 상태다
본래는 매춘부가 될 뻔 햇지만, 카임의 식솔로 같이 살게 된다
타인을 도울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는 성격으로, 이로 인해 큰 고통을 받는다
▲ 에리스 플로랄리아
본래 감옥으로 팔려온 매춘부였으나, 카임이 돈을 주고 구매해 자유를 주는 캐릭터
이 후 의술을 익혀 의사가 된다
자신을 구해준 카임을 주인처럼 생각하고 있는데, 관심을 주지 않으면 사이코패스처럼 변해버린다
▲ 성녀 일레느
노바스 아이텔의 성녀로, 평생 신전 안에서 살았기 때문에 현실 감각이 없는 편이다
정치적 암투에 휘말려 처형당할 뻔 했으나, 카임의 도움으로 살아남는다
▲ 리시아 드 노바스 유리
아버지가 일찍 죽어서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된 캐릭터
수렴청정을 하는 대신의 말만 듣고 세상이 태평한 줄 알았으나, 카임과 만나게 되어 부조리를 깨닫는다
이 후 자신의 세력을 일으켜 대신 일파를 숙청하고 대관식을 통해 정식 황제가 된다
▲ 피오네 실바리아
우화병 환자를 찾아내서 격리수용소로 보내는 방역대의 대장으로, 감옥을 담당하고 있다
책임감이 강하고 고지식하한 스타일이나, 카임을 여러모로 도와준다
▲ 지크프리드 그라도
감옥 지역 마피아 집단인 불식금쇠의 리더
카임과 의형제라 칭할 정도로 매우 친하며, 시나리오 중반까지는 서로를 도우며 우호적 관계를 이어간다
그러나 후반부에는 주인공과 대척하며, 붕괴하는 땅에서 벗어나 감옥민을 살리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 루키우스 디스 밀레일
젊은 장군으로, 혁명가 기질을 지니고 있다
리시아가 대신을 숙청하고 황제가 되도록 돕는 1등 공신
굉장히 사려 깊고 만민의 행복을 위해 뛰는 참된 군인이자 정치가로 보이지만
사실 체제유지를 위해 그 어떠한 것도 희생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며
반란을 일으킨 시민 절반을 절벽 아래로 떨어뜨리는 잔혹함을 보인다
‘예익의 유스티아’는 실패작?
오거스트는 ‘예익의 유스티아’를 통해 다양한 시도를 했습니다. 시나리오 스타일은 물론 CG, BGM, 오프닝, 인터페이스까지 모든 부분에서 파격적인 변화를 보여주죠. 게임 자체 완성도는 훌륭했던지라 꽤 호평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비판도 피하지 못했죠. 기존 오거스트 팬들은 귀엽고, 밝은 이미지를 강조한 브랜드의 매력을 살리지 못했다는 평가를 내렸습니다. 여기에 게임 속에 등장하는 히로인들의 개별 시나리오가 부각되지 않아 아쉽다는 의견도 뒤따랐죠.
▲ 각 히로인의 스토리를 더 보고 싶다고!
▲ 각 히로인의 스토리를 더 보고 싶다고!
이렇게 호평과 혹평이 팽팽하게 부딪히는 건 기존에 오거스트가 쌓아온 브랜드 이미지가 그만큼 확고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게임 완성도가 좋을지는 몰라도 기존 팬들에게는 좀 낯설었던거죠.
오거스트는 ‘예익의 유스티아’ 이후 본래 스타일에 맞춘 ‘대도서관의 양치기’를 발매합니다. 원래 잘하던 스타일이었으니 당연히 평가도 좋았고 큰 성공을 거두었죠. 후일담도, 애니메이션화도 없었던 ‘예익의 유스티아’와는 다르게 ‘대도서관의 양치기’는 팬디스크 발매는 물론 애니메이션화도 됐습니다.
▲ 신작 '천의 인도, 도화염의 황희' 메인 이미지
▲ 신작 '천의 인도, 도화염의 황희' 메인 이미지
그렇다고 ‘예익의 유스티아’가 의미 없는 작품은 아닙니다. 당시 경험은 오는 9월에 발매될 신작 ‘천의 인도, 도화염의 황희’에 영향을 미쳤죠. 이 작품 역시 ‘예익의 유스티아’ 못지않게 무겁고 진중한 세계관과 시나리오를 채택했습니다. 여기에 마냥 무겁기만 했던 '예익의 유스티아'와 달리 주요 무대를 학교로 설정하고 가벼운 일상 스토리를 넣을 예정이라 기존 오거스트 스타일도 적절히 녹여낼 것으로 보입니다. 과연 이 작품은 기존 팬까지 만족시키는 게임이 될 지 궁금해지네요.
▲ '예익의 유스티아' 자체는 상당한 수작이니, 한번 해 보시는 것도...
▲ '예익의 유스티아' 자체는 상당한 수작이니, 한번 해 보시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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