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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열전] 게임을 산업으로 이끈, 아타리 창업자 놀란 부쉬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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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은 가장 대중적인 문화이자 핫한 콘텐츠산업이다. 최초의 컴퓨터 게임으로 인정되는 ‘스페이스 워’는 1961년에 제작되었으나 게임의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점은 이로부터 약 10년이 흐른 1970년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아타리가 있었다. 아타리를 설립한 놀란 키 부쉬넬(Nolan Key Bushnell, 이하 놀란 부쉬넬)은 초기에는 아케이드 게임기를 설계하는 엔지니어로, 이후에는 전문 경영인으로 활동했다. 이러한 그는 현재의 게임산업을 있게 한 ‘비디오게임의 아버지’로 평가되고 있다.

* 본 연재는 NHN과 제휴로 네이버캐스트 [게임대백과]에 함께 게재 됩니다. [바로가기]


▲ 비디오게임의 시작을 알린 놀란 부쉬넬 (사진출처: creativecommons.org)

세계 최초의 아케이드 게임 ‘컴퓨터 스페이스’를 만들다

놀란 부쉬넬은 1943년 2월 5일 미국 유타주에서 태어났다. 콘트리트 업체를 운영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그는 전기공학에 관심이 많았다. 가전제품을 뜯어보는데 만족하지 못했던 부쉬넬는 차고에서 엔진을 장착한 롤러스케이트를 만드는 등, 기계를 만드는 일에 시간을 보냈다. 이후 어린 시절 관심사를 살려 유타대학교 공대에 입학했다. 19세에 라쿤 놀이동산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부쉬넬은 공을 굴려 병을 맞추는 코너를 운영하며 게임산업의 성공 가능성을 엿보게 된다. 놀이동산과 같은 특정 장소에서 게임기기를 오프라인으로 운영하면, 얼마나 수익이 나는가를 실례로 확인한 것이다.

이러한 그를 게임으로 인도한 결정적인 작품이 있었다. 1961년에 개발된 ‘스페이스 워’다. MIT 공대 내 동아리, TMRC의 스티브 러셀과 그의 동료들이 공동 개발한 ‘스페이스 워’는 대학 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스페이스 워’는 은하계를 배경으로, 우주선을 조종하고 어뢰를 발사해 적을 물리치는 것을 주로 삼은 게임이었다. 놀란 부쉬넬 역시 이 ‘스페이스 워’라는 게임에 매료되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그는 컴퓨터가 아니라 게임을 위한 전용 기기를 만드는 것으로 목표로 삼았다. 대학을 졸업한 후, 전자기기 제조사 암펙스에 입사한 그는 이곳에서 비디오 엔지니어링에 필요한 기술을 익혔다. 


▲놀란 부쉬넬에게 영감을 준 ‘스페이스 워’ (사진출처: alteredgamer.com)

회사에 입사한 후에도 놀란 부쉬넬의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은 이어졌다. 아타리를 있게 한, 본인의 첫 작품 ‘컴퓨터 스페이스’ 제작에 착수한 것이다. 놀란 부쉬넬의 ‘컴퓨터 스페이스’는 스티브 러셀의 ‘스페이스 워’를 아케이드 기반으로 옮긴 작품이다. 또한 ‘컴퓨터 스페이스’는 동전을 넣고 한 판을 즐기는 최초의 상업용 아케이드 게임이기도 하다. 그는 ‘컴퓨터 스페이스’의 프로토타입을 직접 제작했는데, 그 때 사용한 재료가 눈에 뜨인다. 게임의 배경인 우주공간을 만들기 위해 놀란 부쉬넬은 평소 즐겨 가지고 놀던 찰흙에 나무조각을 덧대고, 스크린에 플렉시글라스(플라스틱 유리를 잘라 모형을 만들었다. 

이후 그는 암펙스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이자, 훗날 아타리를 같이 창업하게 되는 파트너 테드 대브니에게 본인이 만든 프로토타입을 보여줬다. 놀란 부쉬넬보다 엔지니어링 분야에 일가견이 있던 그는 모형을 섬유유리로 확대해 구현할 수 있는 인력을 찾았고, 3주 후 최초의 비디오 게임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컴퓨터 스페이스’는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당시 제작된 1,500여대 중 대부분이 판매되지 못하고 폐기처분 됐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끄는 데는 성공했으나 너무 어려워서 인기몰이에는 실패했던 것이다. 이를 통해 놀란 부쉬넬은 좀 더 쉽고 대중적인 게임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최초의 아케이드 게임, ‘컴퓨터 스페이스’ (사진출처: wikipedia.org)

게임산업의 시작을 열다, 아타리 설립

‘컴퓨터 스페이스’ 출시 후, 놀란 부쉬넬이 다음으로 추진한 일은 아타리를 설립한 것이다.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게임회사를 세우겠다는 말에 암펙스의 동료들은 놀란 부쉬넬을 말렸다. 1970년대 당시는 스크린을 활용한 영상은 방송국에서 송출하는 것 외에는 없다고 인식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암펙스의 동료 중 하나는 ‘사람들이 게임을 하려고 컨트롤러를 잡으면 방송국이 그것을 어떻게 알고 영상을 틀어주냐’고 묻기도 했다. 

그러나 동료들의 만류도 놀란 부쉬넬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암펙스에 입사하기 전부터 게임과 전자기술의 결합을 꿈꿔왔던 놀란 부쉬넬은 테드 대브니, 래리 브라이언과 함께 창업을 결심한다. 창업이 결정된 것은 반나절만의 일이었다. 어느 날, 테드 대브니의 거실에 모여 앉은 셋은 공동투자 형태로 회사를 세우기로 했다. 당시 회사 이름으로 거론되었던 것은 아타리가 아니었다. 본래는 태양-달-지구가 일직선 상에 있는 상태 혹은 원에서 대칭되는 두 점을 뜻하는 ‘syzygy’를 생각했지만, 다른 회사가 이를 사용하고 있어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놀란 부쉬넬은 평소 즐겨 하던 바둑에서 사용하는 용어 ‘아다리(단수)’에서 착안한 ‘아타리’로 회사 이름을 확정한다.


▲1972년, 드디어 아타리가 설립됐다

아타리는 1972년 6월 27일 캘리포니아 주 서니베일에 문을 열었다. 복잡한 게임성으로 인해 인기를 끌지 못한 ‘컴퓨터 스페이스’ 이후 단순하고 쉬운 게임에 대해 고민하던 놀란 부쉬넬은 1972년 5월에 열린 마그나복스 사의 ‘오디세이’ 시연회에 참석한다. 최초의 게임 전용 기기 ‘오디세이’에는 2인용 테니스 게임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를 본 부쉬넬은 ‘컴퓨터 스페이스’의 뒤를 이을 타이틀의 영감을 얻는다. 아타리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탁구게임 ‘퐁’은 이렇게 탄생했다.

본래 부쉬넬은 레이싱 게임 제작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게임 개발에 도전하는 초보 엔지니어, 알 알콘이 당장 레이싱 게임을 만들어내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 부쉬넬의 생각이었다. 따라서 그는 알 알콘에게 ‘오디세이’에 수록된 테니스 게임의 아케이드 버전을 만들기로 결심했다고 전하며 일련의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놀란 부쉬넬의 아이디어는 화면에 공 하나와 라켓 둘, 점수판을 놓고 서로 공을 주고 받는 것에 그쳤다. 사실 알 알콘에게 일을 맡길 때 놀란 부쉬넬은 ‘퐁’을 출시할 계획이 없었다. 본격적인 개발에 들어가기 전 알 알콘이 필요한 작업 과정을 익히는 연습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알 알콘에게는 타 업체와 유통계약이 완료된 프로젝트라고 알렸다. 작업 효율을 끌어올리기 위한 놀란 부쉬넬의 작전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알 알콘은 공 주고 받기에 그쳤던 놀란 부쉬넬의 초기 기획을 색다르게 발전시켰다. 라켓을 8부분으로 나누어 어느 부분에 공이 맞느냐에 따라 날아가는 각도가 달라지도록 설정한 것이다. 여기에 주고 받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공의 속도가 빨라지도록 설정했다. 즉, 공이 점점 빨라지며 난이도가 덩달아 상승하고 상대가 치기 어려운 각도로 공을 날려야 유리하다는 전략성이 붙은 것이다. 여기에 결과에 따라 관중의 환호와 야유를 넣어 몰입감을 더했다. 이렇게 완성된 ‘퐁’은 부쉬넬의 기대 이상이었다. 이에 부쉬넬과 알 알콘은 1972년 8월에 근처에 있던 바에 프로토타입을 설치하고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주점에 자리한 ‘퐁’은 순식간에 인기를 끌었다. 동전이 가득 차서 게임기가 작동이 안 되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시험 중 문제를 발견한 알 알콘은 이를 해결할 방법을 찾았고. 이후 ‘퐁’은 본격적인 상업화에 뛰어들게 된다.


▲놀란 부쉬넬에서 첫 성공을 안겨준 ‘퐁’ (사진출처: wikipedia.org)

‘퐁’은 최초의 아케이드 게임이자, 처음으로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품으로 기록됐다. 1972년 11월에 출시된 ‘퐁’은 1년 사이에 10,000 대 이상 팔렸으며, 해외에 제품을 수출할 정도로 유명세에 올랐다. 첫 성공을 맛본 놀란 부쉬넬은 게임산업의 가능성을 엿보았다.

놀란 부쉬넬은 어떻게 스티브 잡스를 리드했나

‘퐁’을 통해 게임의 산업적 성공 가능성을 확인한 놀란 부쉬넬은 1978년 11월까지 회사를 이끌며 게임업체로서의 이미지를 탄탄하게 다진다. 아타리를 경영하며 놀란 부쉬넬이 강조한 부분은 ‘창의성’과 ‘혁신’이다. 그의 경영방침은 주변에 숨은 인재를 찾는 것에서 시작해, 면접, 조직을 꾸리는 전 영역에 영향을 미쳤다. 사람을 구하는데 있어서 놀란 부쉬넬은 고정관념이나 편견이 없었다. 필요한 영역에 맞는 사람이라면 ‘웨이트리스’와 같은 관계 없는 직종의 사람을 뽑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훗날 ‘퐁’의 가정용 버전 제작에 참여하며 아타리의 콘솔기기 진출에 단초를 제공한 엔지니어, 밥 브라운을 채용하기로 결정한 곳도 역시 우연히 방문한 수영장이었다 옆에 앉은 밥 브라운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가 커스텀 칩 제작에 일가견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놀란 부쉬넬은 그 자리에서 그를 뽑는다. 이 외에도 점심식사를 위해 방문한 레스토랑이나 강연을 위해 방문한 전시장까지 놀란 부쉬넬의 숨은 인재 찾기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게임하고 돈 벌자’, ‘돈 벌어다 주는 게임을 만들고, 그 중 얼마를 가져가자’, ‘노는 것인지 일하는 것인지 날마다 헷갈린다’, ‘그 어느 때보다 신나게 놀아라’와 같은 채용광고문구를 사용한 것 역시 아타리가 무슨 일을 하는 회사이며, 어떤 곳인지 알리기 위한 놀란 부쉬넬의 전략이었다. 창의력이 넘치는 사람들을 곁에 두기 위해서는 회사 역시 그에 맞는 채용방법을 써야 한다는 것이 부쉬넬의 생각이었다. 

놀란 부쉬넬의 비범한 채용 방침은 괴짜들을 불러모으는데 일조했다. 훗날 군사용 게임으로까지 제작되는 ‘배틀존’을 만든 게임 디자이너, 롯 버그는 그 동안 본인이 만든 물건을 모두 담은 상자를 들고 아타리에 무작정 찾아와 면접을 볼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놀란 부쉬넬이야 말로 본인의 아이디어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 역시 아타리의 광고 문구에 이끌려 찾아와 본인을 채용할 것을 주장한 케이스다.

직원들이 본인의 잠재력을 자유롭게 발산할 수 있는 회사 만들기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경영진의 허가가 없이도 개별 계획을 실행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으며, 필요 없는 체계와 규칙을 자제해 직원들이 원하는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보안문제로 철야를 금지한 규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사에서 잠을 자며 일하고 싶다고 청한 스티브 잡스와 그의 친구, 스티브 워즈니악의 청을 들어준 것이다. 이전에도 스티브 잡스는 일을 그만두고 명상을 위해 인도로 가고 싶다는 뜻을 전한 바 있다. 이에 놀란 부쉬넬을 비롯한 경영진은 유럽에서 발생한 기술적인 부분을 해결해주면 회사에서 경비를 지불할 테니 인도에 들렀다 오라고 잡스를 회유했다. 


▲1974년 당시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 (사진출처: superapple.cz)

회사 회의실에 가볍게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을 놓거나, 직원들의 취미생활을 권장한 것, 회사 안에서 일어나는 가벼운 장난을 눈감아준 점은 심신이 자유롭고 편안한 상태에서야 진짜배기 아이디어가 나온다는 그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훗날 아타리의 히트 상품 중 하나로 기록되는 8인용 레이싱게임 ‘인디 800’은 아타리 내 게임룸에서 열린 축하파티 현장에서 아타리 직원들이 같이 게임을 하다가 나온 작품이다. 같이 게임을 하던 아타리 직원들은 레이싱게임을 여럿이 같이하면 더 재미있을 것이라는 의견을 냈고, 그 때 현장에 있던 엔지니어가 게임 8개를 동시에 하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파티 현장에서 순식간에 기획된 ‘인디 800’ (사진출처: retroland.com)

놀란 부쉬넬이 아타리를 경영하며 강조한 부분은 ‘안 돼’라고 말하지 말 것이다. 중간 관리자가 직원에게 ‘안 돼’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그 아이디어가 왜 안 되는지 혹시 더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찾아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책상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 발로 뛰며 실질적인 정보를 들어야 했다. 실패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프로젝트도 이에 모두 포함되었다. 그는 직원들이 제시한 프로젝트 중 성공 가능성이 낮다고 분석된 것만 따로 추려, ‘우리 손에 남은 것이 이것밖에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고 되묻곤 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빛을 본 게임 중 하나가 1974년에 출시된 1인용 아케이드 게임 ‘Qwak!’이다. ‘총으로 오리를 쏜다’는 기괴한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Qwak!’은 각기 다른 3가지 샷 방식과 실제 총 모형을 본 따서 제작된 전용 라이트 건 컨트롤러를 도입하는 등, ‘발사’라는 부분에 차별성을 두며 의미 있는 성과를 거뒀다. 이유 없는 ‘NO’를 허용하지 않고, 다른 해결방안을 찾아보도록 한 놀란 부쉬넬의 경영방침은 훗날 애플을 설립하는 스티브 잡스에게도 영향을 줬다.


▲하마터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할 뻔한 ‘Qwak’ (사진출처: arcade-museum.com)

한 군데 머물러 있는 것을 싫어하는 놀란 부쉬넬의 성향은 아타리를 경영할 당시에도 나타났다. 그는 아타리 내에서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거나, 회사 조직 일부를 분리해 다른 곳에 두며, 경영 환경을 환기했다. 본래는 아타리의 경쟁사를 견제하기 위해 설립한 아케이드 게임 제작사 ‘키 게임즈’를 시작해, 아타리 소속 게임개발연구소인 액슬론, 가정용 콘솔 시장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아타리VCS(아타리 2600)을 설계한 Cyan-Engineering 등, 놀란 부쉬넬은 새로운 분야에 도전할 신규 조직을 만들며 영역을 넓혀나갔다. 그가 아타리 하부에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 따로 운영한 이유는 미래를 대비하기 위함이다. 회사의 모든 전력이 현재 일에 매달려 있으면, 미래로부터 오는 유망사업에 도전할 여력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부쉬넬의 지론이었다. 

게임의 산업화 시대를 열다 – 아타리의 성장

1972년에 설립된 아타리는 산업이라 부르기 애매할 정도로 미비했던 게임시장을 10년 뒤인 1982년에 30억 달러 규모로 성장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아타리의 초기 주요 타이틀 모두가 놀란 부쉬넬의 머리에서 나온 것은 아니지만, 기발한 작품이 제작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 것은 그의 주요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놀란 부쉬넬은 ‘퐁’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았다. 혁신과 독창성을 강조하며 새로운 영역 개척에 적극 나선 것이다. 1973년에 발매된 ‘고차’는 플레이어 2명이 서로 쫓고 쫓기는 추적 요소를 가미한 미로게임이었으며, 같은 년도에 출시된 ‘스페이스 레이스’는 장애물을 피하며 목표지점까지 도달하는 비행게임의 기초적인 토대를 마련했다. 배구를 소재로 유저들이 공을 주고 받는 ‘리바운드’와 최초의 스포츠 시뮬레이션이라 평가되는 ‘풋볼’, 앞서 소개한 ‘Qwak!’, 플레이어 2명이 대공포로 비행기를 쏘며 누가 더 많이 맞추나를 겨룬 ‘안티 에어크래프트’ 등 각기 다른 콘셉의 게임이 연이어 출시됐다. 

1974년에 출시된 ‘그랜 트랙 10’은 아케이드 기기를 기반으로 설계된 최초의 싱글 플레이어 레이싱게임으로 기록되어 있다. 2인용 게임 ‘탱크’는 탱크를 소재로 한 슈팅에 플레이어 간 대결을 가미했다. 즉, 놀란 부쉬넬은 이전에 없던 새로운 장르를 발굴해내며 게임의 영역을 확장시키는데 주력했다. 위에 언급한 작품 모두가 금전적인 성과를 거둔 것은 아니지만, 이전에 게임으로 제작되지 않은 색다른 분야에 도전한 그의 시도는 초기 게임산업을 풍성하게 하는데 일조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1976년 4월에 출시된 ‘브레이크아웃’이다. 혼자 할 수 있는 1인용 퐁을 만들자는 놀란 부쉬넬의 콘셉에서 시작된 ‘브레이크아웃’은 ‘퐁’의 뒤를 이은 아타리의 대표적인 성공작으로 자리했다. 둘이서 공을 주고 받는 ‘퐁’을 1인용으로 바꾸며 ‘브레이크아웃’은 1명이 벽에 공을 치고, 스테이지 내 모든 벽돌이 없어지면 다음으로 넘어가는 방식으로 돌변했다. 이러한 ‘브레이크아웃’은 미국을 넘어 바다 건너 일본에도 영향을 줬다. 일본의 타이토 사는 ‘브레이크아웃’을 기반으로 한 ‘알카노이드’를 출시했다. 타이토의 ‘알카노이드’는 한국에도 수입되어, 당시 ‘벽돌깨기’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2013년에는 구글이 ‘브레이크아웃’의 출시 37주년을 기념한 이스터에그를 공개하기도 했다. 


▲ ‘브레이크아웃’ 이스터에그는 현재도 즐길 수 있다 (사진출처: 구글 홈페이지 캡처)

이 ‘브레이크아웃’은 애플을 창업한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이 개발한 게임으로도 이름을 알렸다. 명상을 위한 인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스티브 잡스는 ‘퐁’의 제작자이자 ‘브레이크아웃’의 프로젝트 매니저였던 알 알콘에게 4일 만에 게임의 프로토타입을 만들겠다고 공헌하고, 이후 그는 하드웨어 제조사 휴렛팩커드에서 근무하고 있던 친구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본인이 약속한 작업 기한을 지킨다.

‘퐁’과 ‘브레이크아웃’, 2가지 히트작을 낸 놀란 부쉬넬은 다른 고민에 휩싸였다. 두 게임의 아류작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아타리는 타 업체의 복제를 방지하기 위한 독자적인 칩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러한 고민에서 시작된 프로젝트는 아타리의 대표작 ‘퐁’을 가정용으로 옮기는 작업으로 이어졌고, 이전까지 출시된 ‘퐁’ 시리즈를 칩 하나에 담아 이를 전용 기기에 연결해 TV에서 플레이하는 영역까지 발전했다. 1975년에 출시된 ‘가정용 퐁’은 간단한 조작과 가벼운 게임성을 바탕으로 한 시즌에 15만 대가 팔렸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77년 9월 11일에 출시된 아타리 VCS는 전용 기기에 소비자가 구매한 게임 카트리지를 끼워 집에서 게임을 즐기는 가정용 콘솔기기 시장의 막을 올렸다. 경쟁사 페어차일드반도체가 게임이 저장된 카트리지를 교체하며 기기 하나로 여러 개의 게임을 즐기는 기기를 판매하는 것을 본 놀란 부쉬넬은 게임 소비 트랜드가 변화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이에 약 1억 달러 규모의 개발비를 투자해 새 제품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완성된 아타리 VCS는 8비트 프로세스를 기반으로 하며, 상하좌우로 이동을 조작하는 컨트롤러 ‘조이스틱’을 갖추고 있었다.


▲1977년에 출시된 아타리 VCS와 조이스틱 (사진출처: wikipedia.org)

런칭 타이틀 9종, 초기 가격 199달러에 발매된 아타리 VCS는 점진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1977년에 판매량 25만 대를 기록한 아타리 VCS는 1978년에는 그보다 2배 증가한 55만 대의 판매고를 달성했다. 아타리 VCS의 인기는 출시 이후에도 계속 상승곡선을 그렸다. 1979년에는 총 100만 대가 판매되며 크리스마스 선물 베스트셀러로 기록되었으며, 그로부터 1년 뒤엔 1980년에는 판매량이 200만 대에 달한다. 즉, 햇수가 지날수록 판매량이 2배 가량 계속 상승한 것이다. 특히 1980년에는 타이토의 ‘스페이스 인베이더’가 아타리 VCS의 판매량을 높이는 수훈장으로 활약했다.

아타리를 떠난 놀란 부쉬넬과 아타리 쇼크

아타리 VCS를 출시하기 전, 놀란 부쉬넬은 자본 압박에 시달렸다. ‘퐁’의 판매량이 감소하는 와중,페어차일드의 신제품 비디오 엔터테인먼트 시스템(VES)로 인해 게임을 소비하는 경향이 바뀌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더 많은 자본이 필요함을 절실히 깨달은 것이다. 이에 부쉬넬은 여유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워너 커뮤니케이션에 아타리를 2800만 달러에 매각했다. 1977년 크리스마스 시즌 전, 아타리는 임원을 비롯한 전 직원이 생산라인에 투입되어야 할 정도로 밀려드는 주문에 행복한 비명을 질렀으나, 자금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당시 아타리는 하드웨어를 저렴하게 파는 대신, 소프트웨어를 많이 팔아 이윤을 내자는 전략을 사용했는데 초기 아타리 VCS의 게임 카트리지 판매량이 적어 적자를 면치 못한 것이다. 

여기에 놀란 부쉬넬은 아타리 VCS와 관련 소프트웨어의 사업 방향성에 대한 워너 커뮤니케이션의 경영진과의 의견충돌 끝에, 실적저조에 대한 책임을 지고 회사를 떠난다. 놀란 부쉬넬이 떠난 후 아타리는 180도로 변화했다. 혁신과 창의성을 중시 여긴 부쉬넬과 달리 이후에 아타리를 이끌어간 경영진은 유통과 판매에만 비중을 두었다. 여기에 부쉬넬이 초반에 다져놓은 창의적인 회사 조직 역시 기존의 대기업 형태로 전환하게 된다. 이러한 경영 방침은 곧 창의성 없는 수많은 게임의 양산으로 이어졌다. 뭐든지 찍어서 내면 돈이 된다는 태도는 소비자들마저 등을 돌리는 결과를 만들어냈고, 결국 미국 게임산업을 한 순간에 무너뜨린 아타리 쇼크로 이어졌다. 1982년 30억 달러 규모로 추산되는 미국의 게임시장은 1년 뒤인 1983년 1억 달러 수준으로 급감하고 만다.

아타리 역시 타격을 입었다. 1982년 당시 10억 300만 달러 상당의 매출을 기록하며 미국 역사상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성장한 회사로 기록된 아타리는 1983년에 3억 5000만 달러 상당의 적자에 시달렸으며, 1984년에는 여러 부문으로 나뉘어 각기 다른 회사에 매각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아타리 쇼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작품은 영화의 유명세에만 기대어 5일 만에 졸속으로 만들어진 게임 ‘E.T’였다. 아타리가 전량 회수해 뉴 멕시코 사막에 묻었다는 비운의 게임 ‘E.T’는 약 20여 년이 흐른 2014년 6월에 발굴되며 스포트라이트에 올랐다. 


2014년 6월에 발굴된 ‘E.T’ (사진출처: variety.com)

한편, 놀란 부쉬넬은 본인이 처음으로 창업한 아타리를 떠나 새로운 영역 개척에 나섰다. 피자를 먹으며 게임을 즐길 수 있는 레스토랑 ‘척 E 치즈’와 동일한 콘셉을 바탕으로 한 어른을 위한 식당 ‘유윙크’, 로봇 제조 회사 ‘안드로봇’, 사상 처음으로 전자식 내비게이션 시스템을 고안해낸 ‘이택’, 인터넷 혹은 폰으로 네트워크 토너먼트를 개최할 수 있는 아케이드 게임기를 개발하던 ‘아스트로’의 수석 고문 등, 남들이 하지 않은 분야에 도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올해 만 71세의 부쉬넬은 현재까지 총 24곳의 회사를 설립했으며, 지금도 현역 경영자로 활동 중이다. 현재 그는 2012년에 설립한 ‘브레인러쉬’에서 영어나 외국어, 구구단, 화학 등을 마치 미니게임을 하는 것처럼 쉽고 재미있게 배울 수 있는 교육용 소프트웨어 제작에 매진하고 있다.

‘NO’를 ‘YES’로 바꾸는 힘, 게임산업을 개척하다


▲놀란 부쉬넬은 현재도 현역 경영인으로 활동 중이다 (사진출처: nintenderos.com)

놀란 부쉬넬이 처음 아타리를 세우겠다고 했을 때, ‘YES’보다는 ‘NO’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실패할 우려가 높다는 전망에도 부쉬넬은 본인의 목표를 끝까지 밀고 나갔다. 게임이 유망산업이 되리라는 확신과, 숨은 천재를 찾아내는 안목, 새로운 아이디어를 추구하는 모험정신과 이를 실행에 옮기는 결단력이 그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퐁’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영역을 끊임 없이 탐색한 부쉬넬의 활동은 게임산업이 다양한 소재와 장르를 바탕으로 풍성하게 성장하는 부분에 일조했다. 여기에 상업적인 성공이 이어지자 게임산업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NO’에서 ‘YES’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이러한 그의 행보는 현재 게임업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한국의 경우 ‘2차 아타리 쇼크’라 불릴 정도로 성공작의 플레이 요소를 그대로 답습한 모바일게임이 수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최근에는 게임 자체는 물론 마케팅 영역에서도 연이어 표절 의혹이 제기되며 ‘창조산업’이라는 간판이 무색해질 정도다. 재미와 독창성을 무기로 게임산업을 일으킨 아타리가 양산형 게임에 함몰되며 추락한 행보는 ‘게임의 경쟁력은 창조력과 혁신에서 온다’는 놀란 부쉬넬의 지론에 힘을 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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