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다키스트 던전’에 대한 스포일러를 상당 부분 포함하고 있습니다.
▲ 황당한 한국어화로 이슈가 된 ‘다키스트 던전’ (사진출처: 게임 내 영상 갈무리)
최근 국내 게임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군 작품이 하나 있다. 바로 로그라이크 RPG ‘다키스트 던전’ 이었다. 이 게임은 최근 한국어화를 진행했는데, ‘우리 가문에 몰락이 찾아왔다(Ruin has come to our family)’라는 문장을 ‘유적이 우리 가족이 되었다’로 표기하는 등, 도저히 의미를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번역 수준이 열악했기에 국내 게이머들의 분노가 치솟았다.
팬들이 화가 난 이유는 또 있다. ‘다키스트 던전’은 일반적인 로그라이크 게임과 달리 스토리에 꽤 큰 비중을 두고 있다. 던전 깊숙한 곳으로 나아갈수록 조금씩 드러나는 주인공 가문과 던전에 대한 반전이 이 게임의 큰 재미 중 하나인데, 그 내용을 조금도 알아들을 수 없게 번역했으니 문제가 커진 것이다. 결국 제작진은 곧바로 새로운 한국어화 패치를 적용하며 사태를 수습했다.
사실 ‘다키스트 던전’은 스토리텔링이 친절한 게임은 아니다. 게임을 처음 시작하면 배경 이야기가 자세히 소개되지 않고, 전체적인 스토리도 게임 도중 조금씩 제시되는 단서를 조합해야만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에 한국어가 해당 내용을 모른 채 넘어가는 플레이어도 적지 않다. 이에 이번 [세계기행]에서는 ‘다키스트 던전’의 세계관을 정리해보았다.
나잇값 못하는 집안 어른, 그분 뒤치다꺼리에 목숨을 걸다
▲ 이 분 뒤치다꺼리를 하는 게 주된 게임 줄거리 (사진출처: 공식 유튜브 영상 갈무리)
기본적으로 ‘다키스트 던전’ 스토리는 ‘크툴루의 부름’으로 유명한 괴기소설 작가 러브크래프트 소설 분위기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심지어 개발업체인 레드훅스튜디오 이름도 러브크래프트 소설 ‘레드훅의 공포(The Horror at Red Hook)’에서 따온 것인 데다, 최근 출시된 확장팩 ‘더 컬러 오브 매드니스’는 게임 콘셉트까지 소설 ‘우주에서 온 색채(The Color Out of Space)’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만큼 러브크래프트의 흔적을 게임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다키스트 던전’이 러브크래프트의 가장 영향을 강하게 받은 부분은 플롯이다. 러브크래프트 괴기소설을 보면 집안 조상 중 누군가가 괴물과 피를 섞거나 계약을 맺어 후손에게 재앙을 불러오는 내용이 적지 않게 나오는데, 바로 이 ‘저주받은 가문’ 모티프가 ‘다키스트 던전’ 줄거리 및 세계관에 핵심적으로 작용한다. ‘다키스트 던전’은 선조가 일으킨 재앙으로 가문이 몰락하고, 후손이 문제를 수습하던 중 끔찍한 진실을 알게 된다는 내용을 담았다.
▲ 과거 번영했던 주인공 가문의 영지 (사진출처: 공식 유튜브 영상 갈무리)
‘다키스트 던전’ 스토리의 발단은 게임 시작과 함께 소개된다. 주인공은 과거 모두가 부러워했던 부유하고 고귀한 가문의 후손이다. 하지만 그는 모종의 이유로 영지를 떠나 따로 살고 있다가, 곧 갑작스러운 부고와 함께 ‘선조’의 유언장을 받고 돌아오게 된다. 그 유언장에는 본인의 잘못으로 가문이 무너지고, 부유한 항구였던 마을은 퇴락하며, 도적 무리가 무방비 해진 영지를 유린하자, 좌절한 선조가 집안의 미래를 주인공에게 맡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었다.
선조가 저지른 잘못은 바로 금단의 지식을 탐해 저택 지하의 봉인된 유적을 개방한 것이었다. 젊은 시절의 선조는 총명하고 방탕하고 문란한 인물이었다. 온갖 종류의 쾌락과 자극을 즐기던 그는 나이가 들수록 차츰 이 세상에 실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계기로 선조는 이 세상 어딘가에 외계에서 온 끔찍하고 흉물스러운 존재가 잠들어 있다는 이야기를 접했다. 이 존재에 매혹된 그는 곧 고대 문헌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이내 금단의 지식에 푹 빠지고 말았다.
▲ 선조가 저택 지하에서 찾아낸 불길한 유적 (사진출처: 공식 유튜브 영상 갈무리)
사실 선조가 찾던 외계의 존재는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었다. 가문 저택 지하에 외계에서 온 괴물이 잠든 유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오래 전에 잊힌 사실이지만, 본디 그의 가문은 처음 이 유적을 찾은 이들이 다른 사람들의 접근할 수 없도록 세운 요새가 기원이었던 것이다. 이에 선조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곧장 대규모 발굴작업을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부유했던 가문은 점차 가산을 탕진하고 몰락의 길을 걸었지만, 그는 한치 주저함도 없이 발굴을 계속했다.
결국 선조는 저택 지하를 계속 파헤친 끝에 기묘한 유적을 찾아냈다. 그는 이 안에 대체 무엇이 잠들어 있을까 하는 흥분과 기대 속에 유적의 문을 개방했고, 그 순간 공포가 시작됐다. 안에서 실체를 갖춘 광기와 혼돈이 쏟아 나온 것이다. 녹아 내린 살의 파도와 빨판 달린 촉수들의 춤이 인부들을 집어 삼키는 모습을 본 선조는 있는 힘껏 도망친 끝에 간신히 혼자 살아남았다. 허나 저택 지하에서 본 공포는 그를 점점 미치게 만들었고, 이내 삶을 영위할 희망마저 없앴다.
▲ 저택 지하 유적에 있던 흉물스러운 존재 중 하나 (사진출처: 공식 유튜브 영상 갈무리)
스스로 삶을 마감하기 전 선조는 마지막으로 후손에게 부탁하는 유언을 남긴다. 부디 자신이 연 유적을 다시 봉인하고, 이미 기어 나와버린 괴물들을 처치해 위기에 빠진 가문을 구원해달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주인공이 선조의 아들인지, 아니면 먼 친척이나 후손인지는 정확하게 언급되지 않는다. 어쨌거나 주인공은 나름의 이유로 가문 영지로 돌아와 새 가주가 된다. 이후 주인공은 용병들을 고용해 유적으로 보내지만, 탐사가 계속되며 차츰 선조가 말하지 않은 진실이 드러나게 된다.
이렇듯 ‘다키스트 던전’은 호기심 많은 선조가 흥미 본위로 인간이 봐서는 안 될 것을 찾고, 그 대가로 자신과 주변 모두를 파멸시키는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다. 시작은 선조지만, 게임이 진행되면서 주인공과 휘하 용병들도 곧 공포와 절망 속에 이성이 부서지고 광기에 젖는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알고 보니 조상님이 증축하신, 종갓집 지하 던전
▲ 선조의 유언장을 받고 가문 영지로 돌아온 주인공 (사진출처: 게임 내 영상 갈무리)
영지에 대한 탐사를 계속할수록 주인공은 점차 섬뜩한 단서들을 찾고 선조의 환청에 시달리게 된다. 게임 중 흘러나와 상황을 해설해주는 남성 목소리가 바로 선조의 환청으로, 실제로 선조 본인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차츰 1인칭으로 흘리기 시작한다. 처음 이야기는 자기 과오를 후회하고 후계자인 주인공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듯하지만, 후반이 될수록 차츰 가식과 거짓을 벗어 던지고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사실 선조는 단순히 저택 지하의 유적을 발굴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 이전에 선조는 자기 지위와 가문의 부를 사용해 전세계에서 박식한 오컬트 학자를 불러모으고, 불길한 유물을 고가에 밀수하여 수중에 넣어왔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는 점차 단순한 아마추어 오컬트 애호가가 아닌, 진짜 마술을 익히기 시작했다. 본디 총명하고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인 데다 막대한 재산도 있던 그는 금새 스승들을 능가할 정도로 사악한 마술에 능통할 수 있었다.
▲ 저택 지하 유적의 구조를 안 것도 마술 지식 덕분이었다 (사진출처: 공식 유튜브 영상 갈무리)
마술을 익힌 선조는 차츰 영지의 주민들을 제물 삼아 잔악한 실험을 시작했다. 이는 각 던전의 마지막 층에 있는 보스와 대면할 때 선조의 환청으로 직접 전해들을 수 있다. 이 게임에 나오는 보스들이 바로 선조의 뒤틀린 가학성과 호기심으로 실험을 당해 괴물이 된 존재다. 예를 들어 선조는 해외에서 연금술 학자들을 초빙해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우고 그들을 살해했는데, 그 후 학습의 성과를 실험하기 위해 죽은 학자들을 되살린 것이 보스 괴물 ‘강령술사’다.
게다가 선조는 유적을 개방하기 전부터 이계에서 온 사악한 존재들과 계약을 맺었다. 밀수품을 사느라 가산을 탕진한 선조는, 바다 밑바닥에 사는 물고기 인간들을 불러내 자신을 짝사랑하던 마을 아가씨를 노예로 팔아 치웠다. 이 아가씨는 게임에서 물고기 인간들에게 끔찍하게 변이된 ‘사이렌’이라는 괴물로 등장한다. 그런가 하면 선조는 실험 삼아 외계의 존재를 소환해 돼지에 빙의시키기도 했는데, 그 결과가 태어난 괴물이 식인 습성을 지닌 돼지인간 ‘스와인’이다.
▲ 흉측한 ‘사이렌’도 선조가 배신하기 전에는 보통 사람이었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이렇듯 악행을 일삼던 선조는 마침내 충분한 지하의 유적을 개방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유언장에 적은 대로 인부들을 잃고 자신도 반쯤 미치긴 했지만, 절망해 모든 것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게임이 시작할 때 유언장과 함께 보내온 서신부터 거짓이었던 셈이다. 선조는 애초에 계획했던 대로 저택 지하에 잠들어있던 우주적 존재인 ‘기어오는 혼돈’과와 합일했고, 그 자신이 괴물의 하인이고 화신인 존재가 되었다.
그럼에도 그가 자살을 가장한 것은 모두 사악한 음모였다. 아직 ‘기어오는 혼돈’은 깨어나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다시 빚기에 충분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가 온전한 힘을 되찾아 일어날 때까지는 아직도 많은 제물의 피가 흘러야 했다. 이에 ‘기어오는 혼돈’의 화신이 된 선조는 자신의 인간 시절 후손을 이용해 충분한 제물을 모으기로 했고, 아무 것도 모르던 주인공은 가문을 구원하기 위해 보수에 눈 먼 용병과 뜻있는 의인들을 불러모아 사지로 보냈던 것이다.
▲ 주인공이 모은 용병도 모두 희생물에 지나지 않았다 (사진출처: 레드훅 스튜디오 공식 블로그)
모든 것을 안 주인공은 가장 뛰어난 용병들과 함께 저택 지하 유적인 ‘가장 어두운 던전(Darkest Dungeon)’에서 괴물이 된 선조를 찾아 대적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 그를 물리친다 해도 영지는 구원받지 못할 운명이었다. ‘기어오는 혼돈’은 죽지 않는 신적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의 화신인 선조도 불멸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또한 빠르든 늦든 ‘기어오는 혼돈’은 깨어날 것이고, 때가 되면 모든 생물체를 변이 시켜 자기 마음에 드는 모습으로 새로 빚어낼 터였다.
이 사실을 깨달은 주인공은 얼마간 발버둥치지만 이내 끝없는 공포와 좌절로 살아갈 힘을 잃고 만다. 결국 주인공은 자살로 삶을 마감하고, 그 뒤를 이어 다른 후손이 영지로 오게 된다. 이렇듯 게임은 한 가문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사악한 선조의 음모를 저지하기 위해 희생된다는 것으로 끝없이 이어진다. 이는 2회차 플레이에 실제로 반영되는 내용으로, 스토리상 2회차는 1회차 플레이에서 이어지는 것으로 묘사된다.
▲ 수많은 후손이 희생해왔고, 앞으로도 희생이 대물림 될 것임이 암시된 엔딩 (사진출처: 게임 내 영상 갈무리)
이렇듯 ‘다키스트 던전’은 선조의 죄를 무마하기 위해 대를 걸치며 유적을 봉인하는 어느 가문 이야기를 다루었다. 플레이어 가문은 저택 지하의 존재가 일정 수준 이상 회복할 수 없도록 방해하고 있지만, 이 또한 먼 미래 예언된 순간이 오면 부질 없는 몸부림으로 끝난다. 다소 허망한 이야기로 보일 수 있겠지만, 본래 러브크래프트 괴기 소설이 초자연적 공포 앞에 보잘것없이 부서지는 인간 이성의 덧없음을 주제로 삼은 것을 생각하면 정석적인 줄거리인 셈이다.
사실 진짜 주인공은 선조? 조상의 과거 악행 다룬 확장팩들
▲ 선조는 젊은 시절부터 여러 문제를 일으켜왔다 (사진출처: 공식 유튜브 영상 갈무리)
이렇듯 ‘다키스트 던전’은 선조의 뒤틀린 호기심과 비인간성이 불러온 재앙과 그로 인한 문제가 결코 치유될 수 없다는 우울한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에 엔딩도 딱히 다른 이야기가 나올 법한 내용이 아니라, 사실 더 나올 스토리도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선조가 저질렀던 악행 외전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확장팩 ‘크림슨 코트’와 ‘더 컬러 오브 매드니스’는 이처럼 선조가 저택 지하에서 ‘가장 어두운 던전’을 찾아내기 이전에 벌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도 물론 수습은 후손인 플레이어의 몫이다.
▲ 쾌락 살인 저지르고 보니 상대가 뱀파이어였던 사건 (사진출처: 공식 유튜브 영상 갈무리)
이 중 2017년 6월 20일 발매된 ‘크림슨 코트’는 선조가 오컬트에 빠지기 전 어떤 사람이었는지 보여주는 확장팩으로, 내용은 이러하다. 젊은 시절 방탕했던 그는 쾌락을 쫓아 음탕한 파티들을 자주 찾았는데, 어느 날 한 파티에서 매우 아름답고 유혹적인 여인을 만났다. 그 여인이 어찌나 매혹적이었는지, 흥분한 선조는 가학적인 충동에 휩싸여 그를 죽이기로 마음 먹었다. 이 시절 선조는 이미 쾌락을 위해 살인까지 저지르던 싸이코패스였던 셈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선조가 예상치 못한 변수가 하나 끼어 있었다. 사실 여인의 정체는 뱀파이어로, 그도 선조를 죽여 피를 빨아먹을 속셈으로 접근했던 것이다. 살해 계획을 철저히 세운 덕분에 선조는 이 뜻밖의 싸움에서 간신히 뱀파이어를 제압할 수 있었는데, 물리친 뱀파이어의 시체를 보던 그는 문득 광기 어린 호기심과 충동에 휩싸였다. 뱀파이어의 피로 하우스 와인을 만들어서 손님들을 대접해보면 어떨까 하는, 미친 사람이나 할 법한 생각이 든 것이다.
▲ 비범한 정신세계의 선조는 뱀파이어로 와인을 담근다 (사진출처: 공식 유튜브 영상 갈무리)
선조는 정말로 자신이 잡은 뱀파이어의 피를 뽑아서 하우스 와인을 담갔고, 귀족들을 연회장에 초대해 이를 대접했다. 그 진한 향에 취한 귀족들은 아무 것도 모른 채 와인을 들이키다 하나씩 뱀파이어로 변이하기 시작해 서로를 식인 하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한 방울만 맛을 본 선조만 변이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뱀파이어의 피는 선조의 육감을 크게 고양시켰고, 이로 인해서 자기 저택 지하에 잠들어있는 존재를 처음 느끼게 됐다는 것이다.
이렇듯 ‘크림슨 코트’는 ‘다키스트 던전’에 앞서 선조를 오컬트에 빠지게 만든 사건을 조명했다. 물론 여기서 플레이어가 할 일은 선조가 뱀파이어로 만든 후 방치 중인 귀족들, 그리고 부활해 돌아온 원조 뱀파이어 ‘카운테스’를 제거하는 것이다. 선조가 과거에 저지른 일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한다는 점은 ‘다키스트 던전’과 다르지 않다.
▲ 선조가 흥미 본위로 떨어뜨린 운석에 박살 난 농장 (사진출처: 공식 유튜브 영상 갈무리)
2018년 6월 20일 발매된 두 번째 확장팩 ‘더 컬러 오브 매드니스’도 과거 선조 때문에 생긴 또다른 재앙을 다루었다. 오컬트에 탐닉하던 선조는 천체를 관측하던 중 우연한 계기로 외계의 색으로 빛나는 유성을 보고 이를 더 자세히 관찰하고 싶다는 호기심에 불타게 됐다. 때마침 외계 유성이 보일 즈음 인근 농장에 흉작이 들었는데,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선조는 흉작을 일으킨 불길한 별을 없애 주겠다고 농장주를 속여 주술 건 비석을 농장 지역에 세워두었다.
하지만 선의로 포장된 선조의 말과 달리 비석의 기능은 따로 있었다. 사실 비석은 외계 유성을 이 세계로 끌어당기는 닻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선조가 저택 지하 유적을 개방하고도 몇 해가 흐른 후, 과거 세워둔 비석들에 의해 외계의 유성이 마침내 농장에 추락했다. 선조의 예상대로 이 유성은 외계에서 온 사악한 존재의 조각으로, 지상에 떨어지기 무섭게 농장에서 살던 인간과 가축을 괴물로 변이 시키기 시작했다.
▲ 선조 때문에 괴물이 된 또 다른 희생자 농장주 (사진출처: 공식 유튜브 영상 갈무리)
유성과 함께 온 이 존재는 저택 지하에 잠들어 있는 ‘기어오는 혼돈’과는 다른 괴물이었다. ‘기어오는 혼돈’이 생물의 살을 뒤틀고 변이 시켜서 다시 빚어낸다면, 이 새로운 존재는 모든 생명을 외계의 광물로 뒤덮인 괴물로 바꾸고 싶어했다. 하지만 이것은 외계에 거주하는 강대한 존재에서 떨어진 조각으로, 세상을 정복하거나 저택 아래 잠든 ‘기어오는 혼돈’에 도전할 정도의 힘은 아직 갖추지 못했다. 이에 이 존재는 농장을 시작으로 차츰 힘을 키워나가기 시작한 참이다.
여기서도 플레이어는 다시 한 번 선조가 옛날에 흥미 본위로 일으킨 재앙을 수습하느라 고생 좀 하게 된다. 선조 때문에 인생 망치고 괴물이 된 농장주가 보스로 나오는 점도 기존의 ‘다키스트 던전’과 비슷한 부분이다.
조금 진부하지만, 로그라이크 치고는 충분히 재미있는 스토리
▲ 스토리만 놓고 보면 선조에 의한, 선조의 게임이다 (사진출처: 공식 유튜브 영상 갈무리)
이렇듯 ‘다키스트 던전’의 모든 스토리는 선조에서 시작해서 선조로 끝난다. 모든 문제의 원흉인 동시에, 모든 사건 및 인물들과 맞닿아 있고, 그 자신이 최종 보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이 정도면 이 게임의 진짜 주인공은 선조라 봐도 무방할 정도다. 모든 문제가 ‘선조 때문’이라는 이유로 흘러가니, 후반부터는 스토리가 조금 진부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다만 ‘다키스트 던전’이 로그라이크 게임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스토리가 나름대로 재미있고 흥미롭기는 하지만, 사실 이 게임 핵심 콘텐츠는 높은 난이도와 악운을 뚫고 던전을 클리어 하는 성취감이다. 사실 스토리는 플레이어가 던전을 돌파해야 하는 맥락을 제시하여 부수적인 흥미를 일으키는 곁가지에 가깝다. 게임의 주된 재미는 스토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반대로 생각하면 ‘다키스트 던전’은 로그라이크 게임에서 잘 다루지 않는 스토리를 기대 이상으로 부각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스토리 중심 RPG에 비하면 그리 심도 깊지도, 복잡하지도 않지만, 특유의 러브크래프트 소설 같은 이야기로 확실히 독특한 분위기를 더하는 데 성공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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