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정남]은 매주 이색적인 테마를 선정하고, 이에 맞는 게임을 골라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어쩐지 국내에서 피규어(Figurine)는 마니아의 전유물쯤으로 여겨지지만, 애호하는 존재의 모조품이나마 소장하려는 것은 아주 오래되고 보편적인 정서이다. 프랑스 여행을 추억하기 위해 작은 에펠탑을 사는 것과 같은 맥락. 그리스 신화에도 평생 피규어만 바라보다 결국 결혼까지 감행한 조각가 피그말리온의 일화가 유명하다.
눈동자 하나, 살점 한 덩이, 머리카락 한 올까지 정성스레 빚은 피규어는 모니터에서 곧장 튀어나온 듯한 생동감을 자랑한다. 모르는 사람은 무슨 조그만 장난감에 수십만 원씩 투자하냐 하지만 캐릭터 팬덤에게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속 가상의 캐릭터라면 실제로 만져볼 방법이 이것밖에 없기도 하고.
피규어에게 필요한 것은 어설픈 가성비가 아니라 치밀한 원작 재현이다. 아무리 싸도 “누구세요?” 수준이면 줘도 안 가진다. 조금 어설픈 정도까진 참겠는데 진짜 팬심이 훅 사라질 만큼 허접스러운 것도 있다. 이중에서도 특히 보는 것만으로 팬이 실신하겠다 싶은 피규어는 ‘사신상(邪神像)’이라 불리며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5위. 트레이서(오버워치)
▲ 극심한 다이어트로 인상이 변해버린 트레이서의 모습인가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저품질 피규어는 주로 중국산 모조품인 경우가 많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다. 2015년 출시된 ‘오버워치’ 트레이서 피규어는 블리자드가 야심 차게 선보인 정품임에도 황당한 얼굴 조형으로 지탄을 받았다. 트레이서는 전직 전투기 조종사라는 설정을 십분 살린 의상과 날렵한 동세가 특징인데 이 부분은 괜찮다. 문제는 얼굴이다, 얼굴.
원화와 3D 모델링을 통해 접할 수 있는 트레이서의 인상은 부드럽고 당찬 느낌. 커다란 고글이 걸린 코는 동그랗고 입술에 살짝 걸린 미소도 선의가 느껴진다. 그런데 정작 150달러(한화 약 17만 원)나 주고 받아본 피규어는 트레이서를 코스프레한 처음 보는 아주머니였으니. 볼은 비정상적으로 홀쭉하고 눈은 두개골을 뚫고 나올 듯 거대하다.
덕분에 부푼 맘으로 택배를 뜯어본 구매자들은 일제히 머리를 쥐어뜯었고 예약구매에 실패해 발만 동동 구르던 이들은 쾌재를 불렀다는 후문. 무슨 한정판 특전도 아니고 십 만원이 넘는 피규어로 사기를 친 셈이니 분노의 성토가 쇄도했음은 물론이다. 결국 블리자드는 트레이서를 열심히 성형해 무료로 재배포해야 했다.
4위. 세이버(페이트 스테이 나이트)
▲ 모조품이지만 아무 생각도 없어보이는 표정이 묘하게 귀엽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현대의 마술사가 옛 영웅을 소환해 함께 싸운다는 ‘페이트 스테이 나이츠’는 흥미로운 설정과 매력적인 캐릭터로 일본을 넘어 해외에서도 큰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영국의 전설적인 왕을 미소녀로 재해석한 세이버는 10년이 넘도록 관련 상품이 불티나게 팔리는 효녀 중의 효녀 캐릭터. 당연히 정품만큼이나 모조품 피규어도 쏟아져 나왔다.
어차피 모조품 따위는 멀쩡한 겉포장으로 사기를 치거나 정말 돈이 궁한 사람에게 가끔 팔리는 정도인데, 중국에서 탄생한 한 피규어가 이러한 통념을 깨고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어색하게 기울어진 자세와 칙칙한 도색, 투박하기 짝이 없는 마감까지 누가 봐도 ‘짝퉁’이 분명하다. 문제는 그럼에도 이건 이것대로 매력이 느껴진다는 것.
아무래도 대충 만들어진 모조품 피규어는 불쾌감을 주기 마련인데 이 녀석은 드물게도 역효과가 났다. 그렇다고 예쁜 건 아닌데 흐리멍덩한 표정이 묘하게 웃기고 귀엽기까지 하다는 반응. 이런 컬트적인 인기에 힘입어 사신 세이버 코스프레와 동인지가 나오기도 했고 해당 피규어는 프리미엄이 붙어 만 엔(한화 약 10만 원)이 넘게 거래되는 기염을 토했다.
3위. 인피(나인티 나인 나이츠)
▲ 이게 정품, 그것도 한정판 특전으로 주려 했다니 용감하달까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이게 좋아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국산 게임 캐릭터 중에도 ‘사신상’이 있다. ‘나인티 나인 나이츠’ 홍콩 발매 당시 여주인공 인피가 서있는 고급스러운 스노글로브(Snowglobe)가 한정판에 동봉됐다. 왜 굳이 스노글로브인지는 모르겠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라 기절초풍할 피규어의 품질. 무슨 초등학생이 미술시간에 만들어 제출한 것처럼 보인다.
원작의 인피는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기사단원으로 붉은 드레스에 금빛 갑옷을 걸친 카리스마적인 의상이 포인트다. 사실 이 부분은 특전 피규어도 나름대로 충실히 재현하려 했고 칼을 빼든 자세도 일단은 표지에 그려진 그대로다. 그저 완성된 피규어를 시간과 정신의 방에 던져 넣고 100년간 풍화시킨 것마냥 허름한 몰골이 슬플 뿐이다.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하나씩 따져보면 우선 인체 비례가 전혀 맞지 않고, 도색이 마구 번진 것도 모자라 여기저기 벗겨지기까지 했다. 그럴 리도 없겠지만 만에 하나 구매자가 직접 고쳐보려 해도 스노글로브라 유리를 깨야만 한다. 누군가 ‘사신상’을 함부로 훼손치 못하도록 보호막까지 씌어둔 정성에 할 말을 잃었다.
2위. 이슬이(포켓몬스터)
▲ 눈을 마주치기가 무섭다, 집에 두면 분명 저주 받을 것 같아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말이 필요 없는 세계적인 흥행작 ‘포켓몬스터’ 또한 그 인기만큼이나 수많은 모조품이 존재한다. 물론 것들이 다 그렇듯 품질은 기대하기 힘든데, 간혹 원가절감과 무성의함을 넘어 인간적인 악의까지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니까 해당 캐릭터나 그 팬덤을 저주하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심각하게 못 만든 이슬이 피규어처럼 말이다.
이슬이는 물속성 포켓몬을 주력으로 하는 블루시티 체육관 관장으로 주인공 ‘지우’의 오랜 동료이기도 하다. 물속성 관장답게 수영을 즐기는 활기찬 운동소녀인데 피규어는 수영으로 다져졌다고는 믿을 수 없는 짜리몽땅 비만 체형을 자랑한다. 엄청난 목둘레와 떡 벌어진 어깨를 보면 무언가 운동을 하긴 한 모양인데 여하간 수영은 아니다.
여기까진 SD 캐릭터라 이해하고 넘어가자. 진짜 섬뜩한 점은 초점이 전혀 맞지 않는 초록빛 동공과 입 주변에 잔뜩 묻은 빨간 액체다. 평소라면 그냥 입술 칠하다 번졌나 하겠지만 저 눈만 보면 자꾸 불안한 생각이 든다. 하필 피규어 뒤쪽에 진짜 이슬이가 그려져 있어 극적인 대비를 이루는 것은 덤. 차라리 ‘포덕후’ 전용 담력 테스트기로 써먹길.
1위. 코스모스(제노사가)
▲ 이것이 모나리자 미소보다 오묘한 사신 코스모스의 미소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비록 이슬이 ‘사신상’이 살 떨리게 괴기스럽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불법 피규어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런 모조품은 어차피 거리낄 것이 없기에 어떤 형태로든 만들어질 수 있다. 아닌 말로 피카츄를 사서 열어보니 노란 똥이 들어있어도 별 수 없는 노릇. 반면 마지막으로 소개할 ‘제노사가’ 코스모스(KOS-MOS) 피규어는 변명할 여지 없는 정품이다.
문제의 사신상은 ‘제노사가 2: 선악의 피안’ 한정판 특전인 푸른 머리칼의 안드로이드 코스모스. 본래라면 멋들어진 전용 바이크에 탑승한 채 뭇 게이머의 책상 위를 장식해야겠지만 어쩌다 보니 밖에 내놓기 무서운 외형이 돼버렸다. 인간성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풀린 눈과 어딘가 기분 나쁜 입고리, 그리고 거만하게 남을 내려보는 듯한 자세가 압권이다.
2004년 당시 10만 엔을 호가하던 한정판에 이런 피규어라니 말도 안되고 실제로도 엄청난 비난이 잇달았다. 그런데 세상은 넓고 변태는 많다더니, 일각에서 이 코스모스를 뒤틀린 피규어의 여신이라 떠받드는 장난이 유행. 그리하여 사신 코스모스는 오늘날 ‘사신상’이란 개념의 토대가 됐으며 어느덧 원본을 뛰어넘는 인기를 구가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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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이 가득한 게임을 사랑하는 꿈 많은 아저씨입니다. 좋은 작품과 여러분을 이어주는 징검다리가 되고 싶습니다. 아, 이것은 뱃살이 아니라 경험치 주머니입니다.orks@gamemec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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