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의 차이는 삶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극명히 드러납니다. 악당은 한 발 앞서 적극적으로 음모를 추진하고 실패하더라도 굳세게 다시 일어서지만, 영웅은 매번 일이 터진 후에야 늦장 대응하는 수동적인 인물상이랍니다. 다분히 악의적인 해석이긴 한데 이게 또 어딘지 납득이 갑니다. 뭐랄까, 나이를 먹을수록 게임 속 영웅보다 악당에 더욱 공감하게 되는군요.
영웅은 대부분 학생이나 백수임에도, 좋은 혈통과 기연의 힘으로 쉽사리 살아갑니다. 온전히 자신의 힘만으로 매일 일터에서 피땀 흘리는 쪽은 오히려 악당이죠. 물론 그 일터가 범죄현장이고 피땀의 결실은 혼돈과 파괴라지만… 업무를 대하는 그 태도만큼은 본받을만합니다. 딱 태도만.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게임 속 악당의 주요 직업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5위 군인, 악의 제국을 위해 헌신하는 자
게임에 나오는 악당 가운데 상당수가 적대국 소속 군인입니다. 밀리터리 FPS라면 적측 특수부대나 제3국 군벌, 혹은 나치일 것이고 판타지 RPG라면 마왕군 장교나 제국 흑기사쯤 되겠죠. 이들은 주인공 입장에서는 이가 갈리는 원수일지 몰라도 나름의 소속감과 대의를 갖고 있습니다. 간혹 주인공과 같은 소속(주로 상급자)이였다가 뒤통수를 치고 악당으로 돌변하는 특수한 경우도 있죠.
군인 악당은 작품에 따라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뉩니다. 우선 가장 흔히 보이는 모습은 ‘난 나쁜놈이니까 그냥 다 죽이고 범하고 약탈할거야 이히힛’이죠. 소속 국가는 그야말로 도덕적 타락의 온상이고 하달되는 명령은 비효율적일 정도로 살벌한데다, 그 이상으로 악당 본인이 맛이 간(…) 겁니다.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B급 악당이 여기에 속합니다.
그러나 만약 정의의 개념이 모호하고, 선악을 가르기 힘든 게임이라면 등장하는 악당 또한 ‘자신의 조국을 위해 헌신했을 뿐인’ 완고한 무인으로 그려집니다. 대표적으로 ‘록맨 제로’의 ‘크라프트’와 ‘파이어 엠블렘’의 ‘삼용장 머독’, ‘환상수호전’의 ‘테오 맥돌’ 등이 있죠. 이들은 몇 가지 조건 하에 아군으로 포섭이 가능하기도 하니, 공략집을 잘 뒤져보길 추천합니다.
4위 종교인, 신의 이름으로 악을 행하는 자
종교인 악당은 군인만큼 자주 등장하지는 않지만, 일단 나왔다 하면 엄청난 짜증을 유발합니다. 갱생의 여지가 있는 다른 직업과 달리 게임 속 종교인 악당은 무조건 어딘가 뒤틀려 있어요. 어지간히 대범한 게임이 아니고서야 멀쩡한 종교를 악으로 묘사하진 않거든요. 즉 종교와 악당 본인이 둘 다 미쳤거나, 악당은 나름 이성적인데 믿는 종교가 글러먹었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이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열변을 토하며 멀쩡한 사람을 이단으로 몰아 고문하고, 심지어 화형하고, 다른 종교와 전쟁을 종용하는 것뿐입니다. 광신도로 구성된 암살자 집단이나 마신을 부활시킨답시고 처녀를 납치하는 지하 조직도 빼놓을 수 없죠.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범죄는 각양각색이지만, 하나같이 무슨 소리를 해도 절대로 들어먹지 않는 똥고집이 특징입니다.
특히 RPG을 하다 종교인 악당을 만나면 줄줄이 늘어놓는 궤변뿐만 아니라 신성마법 때문에 2배로 짜증이 납니다. 악신도 신이랍시고 적군의 회복과 버프를 책임지기 때문에 여러모로 제거대상 0순위죠. 설상가상으로 주교나 종교 창시자처럼 거물급 악당이라면 최종보스 자리를 꿰차기까지 합니다. 잘 알려진 종교인 악당으로는 ‘창세기전’의 ‘체사레 보르자’, ‘악튜러스’의 ‘비요른 륭스트롬’, ‘데드 스페이스’의 ‘제이콥 대닉’, ‘엘더스크롤’의 ‘맨카 캐모런’ 등이 있습니다.
3위 무도가, 극한의 무력을 추구하다 인성을 버린 자
무도가 악당은 대전격투게임의 필요에 의해 탄생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악당이 뒤에서 계략을 꾸미고 부하들 시켜서 총만 쏴서는 게임이 아예 성립이 안되니 자연스레 무도가 설정이 따라붙은 거죠. 이러니 제대로 수련에 매진하기보다는 무술은 부업이고 본업은 따로 있는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흔한 중국집 종업원부터 대기업 CEO까지 다양한데, 대체 어떻게 그렇게 싸움을 잘하는지…
물론 무도에만 집중하는 악당도 있긴 한데, 캐릭터성이 다소 뻔해지는 문제가 있습니다. 하루 종일 수련만 하는 무도가가 어쩌다 악당이 됐겠어요? 극한의 무력을 추구하다 보니 인성을 버렸다거나, 주화입마에 빠져서 실성했다는 설정밖에는 없죠. ‘스트리트 파이터’에 ‘사가트’가 더욱 박력 넘치는 ‘고우키’ 등장 이후로 존재감이 옅어졌다가, 최근 선역으로 전환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입니다. 순수 무도가 악당끼리는 캐릭터성이 겹치기 마련이거든요.
그렇다고 다른 직업을 주자니, 상술한 것처럼 ‘수련도 안 하면서 너무 강하다’라는 모순이 생깁니다. 난감해진 개발사는 ‘그냥 강하다(…)’라고 넘어가곤 하는데 대표적으로 SNK ‘미스터 빅’, ‘볼프강 크라우저’, ‘루갈 번스타인’이 이런 식입니다. 그나마 몸의 일부를 개조한 강화인간이라거나, 마신의 요력을 받았다는 편이 설득력이 있습니다만. 곧 출시될 ‘더 킹 오브 파이터즈 14’에서는 어떤 설정의 무도가 악당이 나올지 기대되는군요.
2위 박사, 학구열은 없고 세계정복 야욕만 넘치는 자
다음은 악당 세계의 영원한 인텔리, 박사입니다. 보통 흰 가운을 걸치고 높은 확률로 탈모를 앓고 있으며 이름에는 ‘닥터’가 들어가죠. 주로 나쁜 짓을 하려고 지식을 쌓거나, 지식을 쌓기 위해 나쁜 짓을 하며 지냅니다. 비슷한 악당이 여럿이면 헷갈리기 때문에 박사 한 명이 의학, 생물학, 화학, 공학 그리고 유사과학까지 통달하게 되죠. 판타지에서는 고블린이나 임프가 이러한 역할을 맡곤 합니다.
모든 직업이 다 그렇듯, 박사 악당도 자영업이냐 고용직이냐에 따라 삶의 질이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능력만 받쳐준다면 ‘록맨’의 ‘닥터 와일리’나 ‘소닉 더 헤지혹’의 ‘닥터 에그맨’처럼 직접 세계정복에 노려볼만합니다. 원하는 데로 시간과 예산을 쓸 수 있고, 작전이 실패했다고 쥐어박는 상사도 없죠. 다만 자신이 최종보스이기 때문에 주인공이 벌이는 일적, 물적 손괴는 어디 하소연도 못하고 고스란히 감당해야 합니다.
아니면 직접 세력을 이끄는 대신 카리스마 있는 악당의 휘하로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게임 속 박사 악당에 대한 대우는 그야말로 최악인데요. 마치 친구들 조립 PC가 멈출 때마다 불려가는 컴공과처럼 기술 관련으로 조그마한 문제라도 터지면 박사가 욕을 먹습니다. 뼈빠지게 일해서 로봇을 만들어봤자 승리의 공적은 장군들이 다 가져가고, 반대로 패배했을 때는 박사가 제일 먼저 혼쭐이 납니다. 매번 변명은 죄악이라는 소리나 듣고…
1위 왕, 악의 정점에 군림하는 자
당연한 얘기지만, 악당이 꿈꾸는 궁극의 직업은 단연 왕입니다. 그 유명한 마왕은 말할 것도 없고 야만족 족장이나 괴뢰국가 수장도 넓은 의미에서 왕이라 할 수 있죠. 악의 정점에 군림하는 존재로 앞서 소개한 군인과 종교인, 박사가 다 왕의 수족에 불과합니다. 물론 바지사장마냥 부하에게 휘둘리는 경우도 없진 않지만 열에 아홉은 마왕이 게임의 최종보스로 활약하게 됩니다.
대부분 마왕은 부모에게 자리를 물려받기 보다는 자신의 실력으로 강제 계승(…)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그저 사람 좋은 할아버지로 묘사되는 여느 국왕들과 달리 마왕만큼 언제나 힘과 지략이 넘치는 존재로 그려지죠. 결국 무력한 왕은 직접 마왕에 대적하는 대신 팔팔한 왕자나 다른 청년을 용사로 선발합니다. 흐음, 세습제의 한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네요.
실제로 마왕의 치세를 따지고 보면, 마족 입장에서는 굉장히 훌륭한 통치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내정에 대한 묘사가 거의 없긴 하지만, 그만큼 평소에 아무 문제 없도록 관리한다고도 볼 수 있죠. 뭇 게이머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워크래프트’의 ‘살게라스’, ‘드래곤 퀘스트’의 ‘조마’, ‘이스’의 ‘다크 팩트’, ‘크로노 트리거’의 ‘쟈키’ 등은 어줍잖은 영웅쯤은 압도하는 카리스마에다가, 부하들의 충성심도 대단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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