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게임 개발팀들이 만들어지기 까지는 각자 다양한 사유가 있지만, 의외로 많이 보이는 경우가 바로 친구들끼리 모여 “우리도 한 번 게임 만들어보자!”라는 말로 시작하는 경우다. 보통은 한 번도 제대로 된 게임은 커녕 엔진조차 건드려 본 적 없는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열정으로 시작하곤 한다. 이런 방향으로 시작된 개발사들을 [인디言]에서도 곧잘 소개한 적이 있는데, 셔터냥 개발사 ‘프로젝트 모름’이나, 외톨이 개발사 ‘페퍼스톤즈’도 바로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 개발사다.
그리고 여기, ‘치기어린 생각’으로 게임 개발에 뛰어든 팀 비포장도로 또한 그런 개발사다. 아무도 게임 관련 직종에 있었던 적이 없지만, 방과 후 함께 게임을 하던 고등학교 동창들이 다시 모여 만들어지게 됐다. 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개발 중인 게임은 텍스트RPG 말리온으로, 독특한 배경인 ‘석기시대’에 마나와 철학자를 더해 개성있는 세계관을 만들어냈다.
팀 비포장도로가 만들어가는 게임 ‘말리온’은 과연 어떤 방향으로 만들어지고 있을까? 게임메카는 팀 비포장도로의 오지헌 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텍스트RPG + 테이블탑RPG = 말리온
제목인 '말리온'은 이 게임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하는 단어다. 사실 이들이 처음 기획했던 게임은 ‘말리온’과는 확연히 다른 액션 어드벤처 장르의 게임이었다. 하지만 그래픽 디자이너가 없는 팀 비포장도로 사정 상 만들더라도 질 낮은 게임이 나올 것이라고 판단, 해당 기획을 중단했다. 하지만 게임 스토리적으로는 버리기 아깝고 재미있는 요소들이 많았다. 중 가장 중요한 ‘선구자의 일기’라는 아이템을 콘셉트로, 삼은 게임이 바로 말리온이다.
팀 비포장도로는 이 일기장의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방법을 생각하던 중, 자신들이 그나마 수월하게 개발할 수 있는 장르로 텍스트RPG를 떠올렸다. 여기에 게임성을 보강하기 위해 TRPG 요소를 추가했다. “텍스트 RPG의 몰입도 있는 전개에 운과 변수로 나오는 보상이 분기가 되는 TRPG 요소를 적절히 융합시키면 플레이어마다 다른 선택과 결과를 볼 수 있을 것 같았고, 이 결과에서 나오는 즐거움으로 신선함을 주고자 했다”는 것이 오 대표의 말이다.
팀 비포장도로는 여기에 또 다른 차별점들을 더해 말리온만의 개성을 살렸다. 우선, 스테이터스를 없애고 토큰 시스템을 도입해 새로운 접근을 시작했다. 토큰은 플레이어의 마음가짐을 상징하는 요소로, 용기, 지혜, 매력, 기품으로 구성돼 있다. 게임을 시작할 땐 모든 토큰을 하나씩 들고 시작하게 되며, 멀티엔딩 게임인 만큼 완료 시의 토큰이 다음 회에 연동되는 시스템을 만들 예정이라고 한다.
여기에 토큰 시스템을 보조할 수 있는 근성 시스템도 도입했다. 이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플레이할 시, 토큰이 모자라 진행이 막히는 어려움이 생기지 않도록 유도하기 위해 추가된 일종의 보조 기능이다. 오 대표는 “기존 설계 당시 토큰만으로는 재화의 부족함이 생겨 원활한 게임 진행에 방해가 됐다”라며, “토큰을 획득하는 퀘스트나 소모하는 선택지들을 조정하기엔 밸런스적 측면을 전부 해소하기 어려워 이를 보조할 수 있는 근성 시스템을 도입했다”라고 전했다. 더해, “나아가, 운이 굉장히 나빠 정상적인 플레이를 도모했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은 경우를 방지하는 방지책으로서의 역할도 있다”라며 근성 시스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토큰과 근성 시스템을 도입한 이유에 대해 오 대표는 “TRPG는 하나의 사건이 발생해 그 사건을 진행하면서 전투나 탐색 등의 작업을 위해 능력치로 보정되는 주사위를 굴리고, 레벨업을 할 때마다 능력치나 기술 등이 강화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게임을 진행하면서 주사위만으로 선택지가 갈리는 것은 이용자에게 있어서 불쾌한 요소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토큰‘과 ’근성’이라는 시스템을 도입함으로써 적당한 운의 필요와 자유로운 선택의 폭을 제공해 플레이어의 불쾌함을 덜어내고자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무엇보다 말리온이 내세우는 개성은 텍스트RPG다운 스토리적 차별점이다. “석기시대라는 독특한 배경에 마나라는 신비한 물질이 있는 곳은 어떤 모습일까?”라는 질문에서 살을 덧붙여나갔다. 여기에 “석기시대에도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과 같은 탐구와 철학이 뛰어난 인물이 한 명 쯤은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더해 차차 세계관을 정립해나갔다. 이에, 말리온에서는 다른 판타지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철제 장비로 무장한 기사, 연금술사와 마법사 등이 주를 이루며 문명화되어 있는 사회는 볼 수 없다. 게임에서 만날 수 있는 세상은 그저 난잡하고 혼란스러운, 초기 부족 사회의 모습이다.
‘치기어린 생각’에서 시작된 팀 비포장도로
팀 비포장도로는 학교에서 저녁에 같이 모여 게임을 하던 친목 모임에서 시작됐다. 한 명도 게임 엔진조차 다뤄본 적 없으나, 고등학교가 마이스터 고등학교였던 덕에 그나마 프로그래밍 언어 정도는 다룰 수 있었다고. 여기에 평소 여러 게임을 함께 즐기던 사이였던지라, ‘이정도면 우리도 할 수 있겠는데?’ 라는 다소 무모하고 치기어리다 느껴질 생각으로 팀을 결성하게 됐다고 한다.
현재 팀 비포장도로는 본업을 게임개발로 옮기거나 겸업해 가며 열정적으로 게임을 개발 중이다. 실질적인 제작 시간이 부족해 게임의 퀄리티가 낮아지는 것을 우려할 수도 있겠으나, 팀 비포장도로는 각자의 경험을 공유하며 협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참고로 팀 이름인 ‘비포장도로’는 울퉁불퉁하고 정비되지 않은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것과 같은 현재의 상황을 나타내는 이름이자, 나아가서는 끊임없이 노력해 ‘포장도로를 달리자’, ‘포장도로가 되자’라는 뜻을 내포한다는 중의적인 의미로 채택됐다고.
오 대표는 비포장도로를 게임의 예술성과 가능성에 관해 끊임없이 탐구와 도전을 이어나가고 있는 팀이라고 전했다. 그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종합예술이론을 읽고 깨달았다. 모든 음악, 미술, 문학 등 여러 예술 장르가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바그너의 철학에 따르면 게임이야말로 궁극적인 예술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라며, “다양한 이들에게 새로운 즐거움과 감동을 선사하는 것이야말로 비포장도로가 추구하는 게임에 대한 이념이자 철학”이라고 설명했다.
물론 개발과정이 마냥 순탄한 것은 아니다. 현재 팀 내 디자인이 가능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비주얼적인 요소를 어찌저찌 직접 하고는 있지만, 전혀 해보지 않은 분야라 어려운 상황이다. 디자이너를 채용할 생각은 있지만, 팀이 작기에 완전히 채용하는 일은 아직 시기상조 같다는 것이 오 대표의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게임을 미숙하게 마무리 지을 생각은 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거대한 여정을 위한 첫 걸음을 떼며
‘말리온’은 총 7개의 챕터로 구상 중이며 이야기 후반에 접어들수록 다양한 루트가 등장할 예정이다. 챕터 당 의도된 플레이타임은 1시간 정도로, 본편의 최종 플레이타임은 7~8시간 정도로 전망하고 있다. 완전히 마무리된 2챕터까지 작성한 텍스트의 분량만 A4용지로 약 800장이 나온 상황에서 계획해둔 엔딩의 개수가 최소 20종 이상이라고 하니, 스토리의 방대함이 짐작된다.
말리온은 크라우드 펀딩에서 예고한 스케줄에 맞춰 출시가 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팀 비포장도로는 앞서 해보기 분량을 4챕터까지로 생각하고 있으며, 현재는 3챕터 개발 중에 있다. 앞서 해보기 버전에서는 시나리오 뿐 아니라 데모에서 보지 못했던 다양한 콘텐츠를 선보이며, 스토브 인디 데모를 통해 피드백도 받을 예정이다. 정식 출시는 올해 12월로, DLC 없이 완전한 게임으로 출시할 계획이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오 대표는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으니, 그중에 선한 자를 가려서 따르고, 그 선하지 못한 자를 가려서 자기 잘못을 고쳐야 한다"라는 공자의 말씀을 인용했다. 이를 통해 “소중한 유저들에게도 배울 점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며, “현재 아무것도 없는 작은 팀이지만 당장의 작은 소득보다는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유저들의 의견을 우선시해 ‘이렇게 다 주면 뭐가 남나요?’라는 생각이 들 만큼 친화적인 행보를 약속드리겠다”며 말리온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란다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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