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특정 게임이 ‘망한 게임’ 혹은 ‘내린 게임’으로 인식돼버린 경우 일부 게이머들은 누가 개발을 주도했고, 어디서 만들었는지조차 기억을 못한다고 한다.
때는 06년. 그러니까 김본좌가 구속되고, 브아걸이 탄생했으며, 누리꾼들 사이에서 조삼모사 패러디가 한참 유행하던 시절. 플래그십 스튜디오의 빌 로퍼는 ‘헬게이트:런던’ 출시 최종 점검을 하며 해외 모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와 같은 말을 했다. “우리는 블리자드를 퇴사한 후 데이비드 브레빅의 집에 모여 향후 행보에 대해 논의를...” 아, 너무 길다. 축약하면 “우리 게임은 굉장히 스펙터클하게 만들어져 있으니, 여러분이 꼭 재미있게 즐겨주길 바래요.” 정도로 의역할 수 있다. 인터뷰는 전 세계로 뻗어 나갔고, 게이머들은 열광했다. 로퍼신이 만든 게임이니 분명 우리에게 즐거움과 영광을 선사해주실 것이야. 그렇게 믿고 또 믿었다.
이처럼 ‘헬게이트:런던’은 빌 로퍼와 데이비드 브레빅 등 네임드 개발자의 후광을 등에 업고 볼륨을 끝까지 높인 채 출발했다. 그러게, 너무 시끄러웠던 탓일까? 반응은 매서우리만치 차가웠다. 패키지 게임으로는 인정하지만, 온라인 게임으로는 준비가 덜 돼 도저히 인정을 못해주겠다는 것이었다. ‘하프라이프’와 ‘디아블로’의 만남이라는 꽤 신선한 장르 플롯의 설계는 액션 RPG와 차별화되기에 역부족하다는 말이 나왔고, 급기야 그래픽이나 랜덤 시스템, 다양한 형태의 무기 등 검증된 콘텐츠도 게임을 돋보이게 해주는 위력적인 방아쇠가 되진 못할 것이라며 의심받기에 이르렀다.
결국 ‘헬게이트:런던’은 반짝 슈퍼스타에서 평범한 소년의 모습으로 전락했다. 팬들로부터 버림받았고,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다. 이리저리 쫓겨 다니다 겨우 한빛의 품에 안착했다. 소년은 아직 슈퍼스타의 꿈을 버리지 못한다.
한빛소프트가 내놓은 ‘헬게이트:도쿄(이하 도쿄)’는 이러한 과정이 있었기에 더 힘이 든다. 일부 게이머들 사이에서는 이미 ‘내린 게임’으로 인식하고 있어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고, 꼭 그렇지 않더라도 ‘헬게이트’라는 이름만 들으면 빌 로퍼의 얼굴을 떠올린다. 평범한 시각에서 보면 괜찮을 터인데, 그가 만든 거라 그 평범함이 용서되지 않는다. 게임 시스템이나 콘텐츠는 이미 특색이 사라졌다. 도쿄라는 신선한 무대를 맥거핀으로 활용하려 했지만, 뼈대가 그대로니 이마저도 쉽지 않아 보인다.
노력은 인정하지만 온라인 게임으로써 미덕은 여전히 부족해
확실히 ‘도쿄’는 그래픽이나 시스템, 콘텐츠적인 측면에서 콧구멍이 벌름거릴 정도의 놀랄만한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접속하면 여전히 암담한 분위기가 온몸을 감싸고, 콱 막힌 곳에 감금돼 있는 듯해 ‘헬게이트’ 시리즈의 연장선으로 느껴진다.
물론 한빛소프트의 입장에서는 ‘도쿄’가 주는 의미가 각별할 터이다. 플래그십 스튜디오 폐쇄 이후, 남이 만든 게임을 쪼개고 분석하고 쪼개고 분석하기를 반복. 몇 년 간의 지루한 작업 끝에 처음 콘텐츠를 ‘직접’ 만들어 완성한 노력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레저랙션’이나 기타 업데이트가 기존의 소스를 짜깁기해 내보낸 것뿐이라는 걸 감안하면 참 놀랄만한 발전이 아닐 수 없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이제부터 원하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업데이트할 수 있다. 마땅히 박수쳐줘야 할 일이다.
하지만, 칭찬은 여기까지다. 냉정하게 판단해보면 현 상황은 처음부터 다시 개발을 시작해야 하는 원점으로 되돌아온 것뿐이다. 모양새는 갖췄지만 죽은 ‘헬게이트’에 부활 주문을 시전하기에 아직 경험치가 더 필요해 보인다. 특히 온라인 게임으로써 갖춰야 할 미덕이 여전히 부족하다.
▲ '헬게이트:도쿄' 액트1의 중간 보스 식귀 쿠로돈
우선 온 몸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우울한 분위기가 여전하다. 전체적인 색감이 어둡고 음침해 지상이든 지하든 어딜 가도 칙칙하다. 이펙트 효과는 너무 방만하게 처리했고, 시뻘건 불길이 시도 때도 없이 쏟아져 나온다. 다수의 악마들이 엉키면 화면이 너무 지저분해져 내 캐릭터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눈알이 빠질 거 같다. 아무리 암울한 시대적 세계관을 잘 표현한 거라지만 이렇게까지 무리할 필요가 있나 싶다. 시각적으로 부담을 조금만 줄여줘도 전반적인 느낌 자체가 달라질 것 같다.
이 문제는 맵과 악마 우려먹기와 만나면서 더 강력해진다. 새로운 지역을 넘어가도 기존에 갔던 지역과 동일한 패턴이면 구조물도 똑같아 전혀 새롭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 하수구면 똑같은 하수구고, 신사라면 똑같은 신사다. 악마도 그 종류가 다양하지 못한데다 맵의 패턴이나 구조물에 관계없이 항상 같은 녀석들이 등장해 긴장감은 오래 가지 못한다. 어? 이건 기분 탓인가? 몇 바퀴 돌다보니 신규 지역에 대한 설렘이 사라졌다. 오호, 이건 마음 비우고 하라는 로퍼신의 계시군.
이 문제에 결정타를 날려주는 것은 빠른 콘텐츠 소모에 있다. 이번 업데이트에는 ‘도쿄’의 액트1만 공개된 것인데 빨리 하면 몇 시간 안에, 느슨하게 해도 이틀 내로는 모두 클리어가 가능하게끔 설계돼 있다. 참고로 액트1은 총 20개의 지역으로 구성된다. 한빛 소프트는 3개월에 한번씩 대규모 업데이트를 한다고 했다. 몇 바퀴 더 돌고 아이템 좀 맞추는데 1개월을 더 소비한다 치더라도, 그 사이의 갭이 너무 크다. 그렇다고 유저들을 유혹할만한 섹시한 반복 콘텐츠가 준비된 것도 아니다. 결국 같은 화면을 계속 보며 커뮤니티를 통한 즐거움을 찾거나, 스스로에서 난 즐겁다며 주문을 걸어야 한다. 가혹할 정도로 유저들을 방치하는 셈이다.
온라인 게임으로써 인정받기 위해서는 비주얼도 중요하지만, 콘텐츠는 더 중요하다. ‘도쿄’는 아쉽게도 이 두 가지 요소가 여전히 부족한 실정이다. 차후 업데이트에서 PVP 강화 등 지루한 반복 플레이 해소를 위한 신규 콘텐츠를 제공한다고 하지만,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너무 길다. 결국 유저들만 더 고생하게 생겼다.
▲ 여전히 어둡고 음침해 시각적으로 부담스럽다
▲ 고질적인 문제점, 똑같은 거 보고 또 보고 계속 보고
‘도쿄’는 새롭게 부활할 가능성은 있는가?
‘도쿄’ 전체그림을 놓고 봤을 때 이번에 공개된 액트1은 작은 씨앗일 뿐이다. 때문에 이번 업데이트만을 놓고 ‘헬게이트’의 부활 가능성을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허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가능성’이란 열매는 분명 품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 싹이 보이진 않으나 물주고 햇볕만 잘 쬐어주면 금방 싱싱한 열매가 나올 것 같다. 그래서 더 기다리고 싶다. ‘도쿄’에 공개된 콘텐츠나 시스템의 변화는 대부분 이런 모양새를 하고 있다.
▲ 액트1의 최종 보스 '카이부츠나탄'의 신전 앞
우선 ‘헬게이트:런던’은 출시 이후 지금까지 늘 랙 문제가 골머리를 썩여 왔다. 화면에 나타나는 개체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엄청난 랙 폭풍이 발생해 프레임이 쭉쭉 상승했고, 약 1분 정도 게임을 플레이할 수 없을 정도로 화면이 툭툭 끊기는 현상이 종종 발생했다. 이 랙의 주범은 개인 PC가 아닌 서버 자체에서 발생하는 것이므로, 유저들은 하루빨리 고쳐주길 바라며 기다리는 것 외에 특별한 방법이 없었다.
한빛소프트 개발자는 일전에 진행된 인터뷰에서 ‘헬게이트’가 원래 패키지 기반의 게임이다 보니 온라인화 시키는데 근본적으로 고쳐야 할 부분이 많다는 점을 강조하며, 그래픽 쪽으로 최대한 부담을 줄여 랙 문제를 해소해 보겠다고 했다. 의도가 정말 괜찮아 보인다고 전하자, 개발자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웃었다.
확실히 ‘도쿄’에 접속하면 그래픽의 무게가 예전에 비해 가벼워졌다는 사실을 체감할 수 있다. 그래픽을 약간 뭉개 캐릭터나 기타 사물의 디테일을 낮췄기 때문이다. 물론 줌을 하기 전까지 겉모습만 보면 크게 티가 나지 않아 퀄리티 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사물 하나하나에 세부 묘사를 하지 않고도 전체적으로 완성도 높은 조화를 이뤄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래픽의 무게가 줄었으니 서버도 그만큼 부담이 덜 하다.
이런 노력 덕분에 자잘한 랙은 확실히 줄었다. 특정 지역에 들어섰을 때 1분 정도 갑자기 버벅이는 현상이나 클라이언트가 불안해 팅겨 버리는 문제만 잘 손본다면, 두통의 근원이었던 랙 문제는 조금이나마 해소될 것으로 보인다.
▲ 라데온 4850 1900x1200 해상도 풀옵션, 눈이 내려도 문제 없어!
다음으로는 무대. 한빛 소프트가 도쿄를 무대로 잡은 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아시아 시장을 공략하기위해 인지도 높은 도시를 선택한 것이고, 하나는 서양권의 문화와는 전혀 다른 동양권을 선택해 톡톡 튀는 신선함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아시아 시장 공략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듯 보인다. 이미 서비스 판권은 모두 확보한 상태라 올 하반기부터 일본을 시작으로 중국, 동아시아 지역에 차례로 진출한다고 한다. 이 정도 시간이면 ‘도쿄’의 액트1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액트도 적용시킬 수 있으니 콘텐츠 부족을 걱정할 필요도 없을 터이다.
그렇지만 후자의 경우 아직 그 느낌이 명확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분명 일본 도쿄인데, 전혀 일본 같지 않아 하는 말이다. 하수구는 런던의 하수구와 똑같이 생겼고, 도시는 이미 다 파괴돼 있어 그냥 폐허에 불과했다. 꼭 도쿄가 아니라 베이징이나 부산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였다. 여기에 아까 언급했던 같은 구조물 사용하기가 여기 저기 맵에 흩뿌려져 있어, 지금 일본 모습을 기대했다면 실망을 할 수밖에 없다.
매우 다행히도 액트1의 마지막 지역인 ‘에도성’은 확실한 고유의 느낌이 있었다. 일본만의 건축양식을 잘 살려내 디자인된 탓인지, 겨우 배경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플레이하는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눈이 정화되는 느낌이랄까? 남은 액트2부터 20까지 이러한 고유의 배경이 계속해 나와 주기만 한다면 완성된 그림에는 같은 맵 무한 반복이라는 ‘헬게이트:런던’의 악몽은 보이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 도쿄 맞아? 그냥 폐허 아냐?
▲ 개인적으로 너무 느낌이 좋았던 '에도성'
세 번째로는 반복 플레이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전투. 콘텐츠가 전부 바닥난 상태에서도 유저들을 지금까지 남아있게 해준 원동력이 바로 이 전투가 주는 재미다.
이 전투 부분에도 변화를 시도한 노력이 보인다. 일단 공간을 넓혔다. 도쿄에서는 답답한 지하세계에서 주로 전투가 이루어졌지만, ‘도쿄’의 액트1은 60% 이상이 지상에서 전투가 진행된다. 맵 구성도 뻥 뚫린 개방형으로 바꾸었기 때문에 더 자유롭게 움직이며 싸울 수 있다. 물론 지금은 악마가 엉망으로 배치돼 그저 보이면 달려드는 강아지싸움 형태지만, 이 역시 잘 다듬기만 하면 때론 긴장감을, 때론 통쾌함을 적절히 버무려 선사하는 ‘헬게이트’ 전투 특유의 재미를 줄 수 있을 것 같다.
샌드백이 되는 악마는 비록 그 종류가 다양하게 증가한 건 아니었으나 보스 몬스터가 고유 패턴을 갖추고 있어 의외로 공략하는 맛이 있었다. 한 예로 중간 보스인 식귀 쿠로돈은 특정 시간마다 모든 공격에 면역이 되는 능력을 발휘하는데, 이때 주변에 켜진 횃불에 불을 꺼야만 공격이 가능해진다. 게다가 주기적으로 범위 기절 공격을 하기 때문에 여차하면 캐릭터가 사망한다. 꽤 어렵다.
이와 같이 보스 몬스터의 고유 패턴화 시도는 참 좋아 보인다. 아직은 살짝 어설퍼 한번만 해보면 금방 꼼수를 부려 쉽게 잡을 수 있겠으나 이를 기반으로 난이도를 올려 한번의 실수가 바로 사망으로 이어지는 단계로 끌어 올린다든지, 파티원과 호흡을 요구하는 식의 형태로 발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하다. 확실한건 이로 인해 전투는 더 재미있어졌다는 것이다.
▲ 엄청나게 부활해서 겨우 때려잡은... 식귀 쿠로돈
▲ 결국 이 녀석은 못 잡았다
이밖에도 한빛소프트는 공식 페이지 ‘개발자 노트’를 통해 아직 남아 있는 버그 수정, 스킬의 다각화와 밸런스 조절, 악마 리스폰 실시, 신화 등급 아이템 적용 등 향후 1개월 동안 변화될 게임의 방향에 대해 공개했다. 그동안 너무 콘텐츠에 굶주려 유저들의 불신이 완전히 가라앉은 상태는 아니지만, 문제점을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보완해 나간다는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어 차차 회복되는 상태다.
슈퍼스타가 되고 싶은 '헬게이트:도쿄'
확실히 ‘도쿄’의 현재 모습은 유저들을 만족시키기에 아직 한참 부족하다. 겉으로만 보면 기존과 비교해 무엇이 달라졌는지 알아보기조차 힘들다. 하지만 한빛소프트는 더 이상 기존 소스를 재활용하는 것이 아닌 콘텐츠를 직접 개발해 넣을 수 있다는 것은 입증했다. 그리고 이것을 ‘도쿄’라는 무대에 하나씩 선보인다고 했다. 결국 시간이다. 더 기다려야 한다. 한빛 소프트는 유저들과의 약속을 지킨다고 했으며 “한번에 다 만족시켜 드리긴 힘들겠지만 지금만큼, 지금 이상의 것을 보여드리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변화하려는 움직임이 꽤 역동적인 것으로 보아, 이건 ‘진짜’인거 같다. 가능성도 충분히 보인다. 이미 마음이 떠난 유저들은 모르겠지만, 현재까지 남아 있는 유저들의 입장에서는 즐거운 소식임이 분명하다. 기다린 보람이 있다.
그렇다면 ‘도쿄’는 다시 한번 슈퍼스타가 될 수 있을까? 이 부분에 대한 해답은 결국 재미에 있다. 게임이라는 게 야채가 좀비를 공격하든, 두덕리에 할매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든 별 문제가 아니다. 게이머들은 재미만 있으면 된다는 심정이다. 그렇다. 바로 재미다. ‘도쿄’라는 무대가 완성되면 어떤 모습일지 아직 알 수 없으나, 악마가 꽃밭 위를 뒹굴어도 '재미'만 있으면 끝난거다. 굳이 힘들게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미 슈퍼스타가 돼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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