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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기행] 검과마법 대신 '정치' 담은 판타지, 그라나도 에스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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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타지'는 줄이고 '정치' 요소를 추구한 '그라나도 에스파다'
(사진출처: '그라나도 에스파다' 공식 홈페이지)

일반적으로 판타지에는 인간의 다양한 면을 반영한 여러 종족들이 등장한다. ‘고상함’은 엘프에, ‘끈기’는 드워프에, ‘악의’는 오크에 반영되는 식이다. 이처럼 인간이 지닌 여러 면이 각 종족에게 극단적으로 나뉘어 반영되다 보니 전통적 판타지에는 ‘선한 종족’과 ‘악한 종족’이 나뉘고, 그에 따라 대립구도도 분명히 나뉘곤 한다. 오크와 고블린이 나쁜 짓 하는 이유를 궁금해하는 사람은 드물고, 인간이 오크를 보자마자 공격하는 데 의문을 품는 사람도 거의 없다.

그런데 만약 인간만 나오는 판타지가 있다면 어떨까? 아마 톨킨식 판타지에 비해 훨씬 복잡하고 질척한 드라마가 나올 것이다. 선과 악은 불분명하고 상황에 따라 친구와 적이 달라지니 말이다. 물론 판타지 특유의 공상적 재미는 줄어들겠지만, 보다 입체적인 세계관이 될 가능성은 높다.

2006년 출시된 ICM게임즈 MMORPG ‘그라나도 에스파다’는 바로 이러한 구상에 초점을 맞췄다. ‘그라나도 에스파다’는 중세 유럽 판타지를 탈피, 17세기 근세 ‘정치’와 ‘자유’를 중심소재로 내세워 ‘정치 드라마’를 담고자 했다. 실제로 ‘그라나도 에스파다’는 초기 기획상 ‘다른 종족이나 괴물과의 대립이 아닌 복잡한 사회상을 그리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즉, 선과 악이 명확히 구분된 전통적 판타지가 아닌, 사실적인 ‘정치물’을 지향했던 셈이다.

‘중세 모험 판타지’를 벗어나 ‘근세 정치 판타지’를 지향하다

‘그라나도 에스파다’가 아직 개발 중이던 2005년, 당시 PD를 맡고 있던 김학규 IMC게임즈 대표는 게임메카와의 인터뷰에서 이 게임에 “민주주의에 대한 질문이 들어있다”는 말로 서두를 열었다. 게임 시스템상으로도 그렇고, 세계관과 스토리도 “중세 판타지 열풍을 벗어나서 17세기 유럽을 바탕으로 개인과 사회의 거대한 흐름과 격변을 다룬다”는 이야기였다. 그 때만 해도 게임 이름은 이러한 김학규 PD 철학에 따라 ‘리퍼블리카’로 명명되어있었다. ‘공화국’이라는 뜻이었다.

이후 접근성을 감안하여 정치 요소를 줄이고 게임 이름도 ‘그라나도 에스파다’로 바뀌긴 했지만, 김학규 대표는 여전히 ‘던전 앤 드래곤’으로 대표되는 나이브한 모험 판타지를 탈피해 사실적인 정치상을 게임 세계에 옮겨놓고 싶어했다. 단순히 영웅이 괴물과 싸우고 악을 무찌르는 내용이 아닌, 사회 자체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그는 ‘검과 마법’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나아가 사회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 바다 건너 식민지에서 벌어지는 음모와 당파 싸움이 주요 소재
(사진출처: '그라나도 에스파다' 공식 홈페이지)

이러한 방향성 하에 기획된 ‘그라나도 에스파다’ 세계관은 실제 16세기 유럽 역사를 토대로 제작됐다. 반도의 소국 ‘베스파뇰라’는 우연한 계기로 대양 너머의 신대륙 ‘그라나도 에스파다’를 발견하고, 여기서 얻은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강대국 반열에 오른다. 하지만 빠르게 세를 넒히는 ‘베스파뇰라’를 위험하게 여긴 국가도 있었으니, 이후 ‘베스파뇰라’는 기존 해양 패권 국가 ‘브리스티아’와 전쟁을 벌이게 된다. 그렇게 두 국가가 명운을 걸고 치열하게 맞선 결과 승자는 ‘베스파뇰라’였다.

이후 ‘베스파뇰라’는 다른 해양국가 ‘브리스티아’와의 패권다툼에서 승리하고 최강국으로 거듭난다. 하지만 전쟁을 위해 양성된 군인, 그리고 공을 세워 작위를 받은 신진귀족은 전후 큰 사회문제로 남는다. 이에 여왕은 제대군인과 신진귀족을 ‘그라나도 에스파다’ 대륙에 보내, 사회문제를 줄이는 동시에 식민사업까지 확장하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이렇게 보내진 하나의 ‘가문’을 맡아 플레이 하게 된다.

본디 ‘그라나도 에스파다’ 대륙은 유래를 알 수 없는 유적, 위험한 괴물, 진귀한 광물 등이 잠들어 있는 땅이었다. ‘베스파뇰라’에서 온 사람은 기회와 위험이 공존하는 이곳에서 극적인 인생역전을 꿈꿨지만, 식민지도 사람간 분쟁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식민지인들끼리는 더 많은 이권을 위해 대립했고, 본국에서는 식민지인들이 너무 큰 부를 거머쥐어 분리주의적 움직임을 보일까 걱정해 간섭을 일삼았다. 식민지에서도 계층간, 가문간, 정당간 대립은 치열했던 것이다. 게임은 이러한 식민지의 정치적 혼란 속에 플레이어의 '가문'이 휘말리면서 시작된다.


▲ 괴물도 나오지만, 이들과의 대립이 세계관의 핵심은 아니다
(사진출처: '그라나도 에스파다' 공식 홈페이지) 

이처럼 ‘그라나도 에스파다’는 괴물과의 싸움, 던전 탐사 등 전통적 판타지 소재도 물론 차용했다. 하지만 세계관에서 핵심적으로 다루어지는 갈등은 어디까지나 인간끼리 세속적 이해관계를 놓고 벌이는 정치적 대립의 드라마였다. 세속적인 사회문제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주제의식을 흐릴 수 있는 전통적 판타지 요소는 과감히 배제시켰다. ‘그라나도 에스파다’는 다소 과감할 정도로 인간 중심의 근세적 정치상을 보여주고자 했다.

‘현실 정치가 판타지보다 더 판타지 같다’는 말을 실제 게임에 대입했던 셈이다.

‘정치 드라마’를 추구한 MMORPG


▲ '당파'와 '가문' 성원에 따라 스토리는 다른 노선을 걷게 된다
(사진출처: '그라나도 에스파다' 공식 홈페이지)

‘정치’ 요소가 재미있게 느껴지게 하기 위해서는 설정만으로는 부족하다. 상대를 복종시키고, 저항하고, 대립하는 개인간의 정치활동을 구체적이면서도 극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즉 정치관계에 대한 스토리텔링 필요하다. 때문에 대부분의 게임은 ‘정치’라는 요소를 부수적인 소재로만 쓰지, 핵심 소재로까지 끌고 오는 일은 드물다. 그만큼 활용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판타지에서는 집단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개인의 뛰어난 업적에만 집중하는 일이 많다.

반면 ‘그라나도 에스파다’는 상당히 독특한 시스템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플레이어는 하나의 캐릭터가 아닌 ‘가문’ 역할을 맡고, ‘가문’에 소속된 여러 캐릭터를 동시에 조작한다. 새 캐릭터를 영입하고 싶다면 해당 캐릭터가 자기 ‘가문’에 빚을 지게 하는 ‘영입 퀘스트’를 수행해야만 한다. 그리고 ‘영입 퀘스트’에도 대립 관계 인물은 동시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식의 요소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원수 사이인 ‘에두아르도 힝기스’와 ‘커트 린든’은 둘 중 하나만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러한 요소가 어떻게 보면 별 것 아닌 선택지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이해관계, 은원관계, 소속파벌 등 정치적인 선택을 요구하는 MMORPG는 드물고, 하물며 자기 선택이 스토리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는 게임은 더욱 많지 않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그라나도 에스파다’는 MMORPG 틀 속에서 ‘개인의 모험’ 대신 ‘가문의 영달’이라는 목적을 내세우고, 인재를 영입하는 과정을 다루며, 선택에 따라 스토리가 달라지는 등, 정치적 요소를 꽤 드라마틱하게 연출해냈다.


▲ '에두아르도'와 '커트'는 서로를 배신하기 때문에 둘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
(사진출처: '그라나도 에스파다' 공식 홈페이지)

여기에 비록 분기점이 삭제되기는 했지만, 소속에 따라 다른 시나리오를 타게 되는 등의 요소도 존재했다. 예를 들어 ‘베스파뇰라’ 여왕은 ‘철가면’처럼 숨겨진 동생이 있는데, 플레이어가 동생을 찾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선택지가 있었다. 여기서 여왕에게 충성하는 ‘왕당파’와, 공화정을 이룩하고자 하는 ‘공화파’에 따라 스토리가 갈리게 되었던 것이다. 비록 이후 너무 복잡하다는 이유로 선택지가 삭제되기는 했지만, 플레이어의 정치적 선택을 전면에 내세운 시나리오는 참신했다.

이처럼 ‘그라나도 에스파다’는 ‘검과 마법’으로 대표되는 판타지 전투 외에도, ‘정치’ 소재를 적극 활용했다. 덕분에 게임은 개인의 모험이 아닌 가문, 정당, 국가 단위의 이야기로 진행되며, 각지의 인재를 모아 가문의 힘을 기르고 거대한 계획을 진행시켜나가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모험보다는 무도회나 밀실정치에 어울릴 법한 의상 디자인


▲ 공개 당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그라나도 에스파다' 캐릭터 의상
(사진출처: '그라나도 에스파다' 공식 홈페이지)

‘중세 모험’보다 ‘근세 정치’를 택한 ‘그라나도 에스파다’의 선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또 하나의 측면이 바로 캐릭터 의상 디자인이다. 당시 ‘그라나도 에스파다’ 캐릭터 의상은 업계에서 주요한 화제로 떠올랐다. 대부분의 캐릭터가 전사보다는 궁정인(courtier)에 가까운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MMORPG는 어느 정도 모험가라는 궤 안에서 캐릭터를 디자인했다. 사슬갑옷을 입고 있든, 마법사의 로브를 입고 있든, 어쨌든 간에 황무지를 떠도는 전투원이라는 인상을 주는 의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라나도 에스파다’는 17세기 말 바로크 양식의 드레스, 남성용 타이즈, 프릴 달린 큰 모자 등, 아무리 봐도 싸우러 나가는 사람이 입을 것 같지는 않은 의상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러한 의상 디자인은 당시에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상술했듯 ‘그라나도 에스파다’도 전투를 중시하는 MMORPG고, 이러한 의상은 고증에 맞지 않는 면이 있다. 그러나 고증이야 어쨌든 간에 바로크 양식 의상으로 ‘그라나도 에스파다’는 고상하고 우아한 근세적 분위기를 통일감 있게 드러냈고, 이 점으로 말미암아 기존 판타지 게임에는 흥미를 못 느꼈던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유입될 수 있었다. 여기에 웅장함과 긴박감 대신 깊은 서정성을 담은 OST도 게임 특유의 세련된 분위기를 더해주었다.

그러나 이제는 너무 달라진 분위기


▲ 점점 '사회'와 '정치'가 아닌, 초자연적인 힘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스토리
(사진출처: '그라나도 에스파다' 공식 홈페이지)

이상 살핀 것처럼 ‘그라나도 에스파다’는 ‘반지의 제왕’과 ‘던전 앤 드래곤’으로 대표되는 전통적 중세 판타지에서 벗어나, 근세 사회와 정치라는 독특한 소재를 들고 나왔다. 또한 단지 설정에만 머물지 않고 실제 게임 속에 이를 녹여내는 대담한 시도까지 선보였다.

하지만 서비스 기간이 너무 길어진 탓이었을까? 이제 ‘그라나도 에스파다’ 세계관은 2006년 처음 공개됐을 때와는 다소 다른 분위기가 되고 말았다. 초기 세계관이 판타지 요소가 가미된 사실적 근세 ‘정치물’이었다면, 이제는 그토록 벗어나고자 했던 전통적 판타지상으로 조금씩 회귀 중인 모습이다. 인간이 중심이 되는 ‘정치’ 이야기는 희미해지고 사악한 마법사, 악마, 신 등이 전면에 등장해 세상을 위험에 빠뜨린다.

이러한 변화는 게임 내 중요한 악당으로 등장하던 '몬토로'의 최후 이래 점점 가속되고 있는 듯하다. 식민지 '그라나도 에스파다'에서 악행을 일삼던 네크로맨서 '몬토로'는 본래 본국의 귀족 비밀결사단을 등에 업고 활개 치는 자였지만, 결말에 가서는 그만 처치하면 식민지에서의 큰 문제는 일단락되는 것으로 끝이 났다. 게다가 이후에는 악마들이 지상을 침략해오고, 타락한 신 '오르덴'이 봉인을 풀고 일어나 활동에 나서는 등, 세계관의 초점이 점점 ‘사회’가 아니라 특별한 힘의 ‘개인’으로 옮겨가고 있다.

물론 이러한 변화가 한 번에 갑자기 일어난 것은 아니다. ‘그라나도 에스파다’가 나온지도 벌써 1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고, 그 사이 제작진도 변동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에 따라 게임 방향성이 달라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근세의 사회와 정치라는 독특한 소재를 들고 나왔던 ‘그라나도 에스파다’ 세계관이, 고유한 멋과 풍미를 포기하는 모습은 조금 안타깝게 느껴진다.
이새벽
게임메카 취재팀 기자 이새벽입니다. 게임 배경에 깔린 스토리와 설정을 좋아하고 관심이 많습니다. 단지 잠깐 즐기는 것이 아니라 게임을 깊게 이해할 수 있는 기사를 쓰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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