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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 레슨: 미야모토 히카리, 딱 30분만 ‘여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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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막 한글화로 국내 정식 발매된 '서머 레슨: 미야모토 히카리' (사진제공: 반다이남코)

2014년 9월, ‘철권’ 하라다 PD의 신작 ‘서머 레슨’이 공개됐을 때 좌중은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당시 ‘서머 레슨’은 아직 상용화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VR 시장에서 SSS급 기대작으로 꼽히며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모았다. ‘서머 레슨’의 새 정보나 영상을 다룬 기사는 항상 높은 조회수를 기록했고, 도쿄게임쇼나 지스타 등지에서 시연이 이루어지면 가장 긴 줄이 섰다.

바로 그 ‘서머 레슨’이 지난 4월 27일, 자막 한글화로 국내 정식 발매됐다.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를 계기로 PS VR을 장만하며 ‘미야모토 히카리’와 만날 채비를 했다. 기자 역시 이에 동참했다. 여자친구 없이 살아왔던 기나긴 세월. 언어 장벽으로 인해 만나지 못했던 ‘러브 플러스’의 그녀들이나 차마 빛을 보지 못하고 사망한 ‘시유’를 대신할 인연. 그녀를 만나러 가 봤다.

1주차 플레이 “히카리를 만나기 위해 지금껏 살았어!”

카페에서 과외 의뢰를 받고 방에서 기다리다 보면, 미야모토 히카리가 엄마와 대화하며 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녀는 자신의 방에 앉아 있는 낯선 남자(나)를 보고 당황해 하지만, 곧 마음을 열고 친근하게 대하기 시작한다. 그 모습이 여간 귀여운 것이 아니다. 히카리와의 첫 만남은 기대 이상이었다. 뇌내망상이나 극한의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아도, 그녀는 내 앞에 존재했다.

본격적으로 게임을 시작하면 현실감은 더욱 극대화된다. 주변을 둘러보자 깨끗하면서도 적당히 어지럽혀져 있는 책상. 정돈돼 있는 침대. 과하지 않은 내부 장식, 일본 가정집다운(직접 본 적은 없지만) 적당히 좁은 방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돌리면, 조그마한 의자에 앉아 공부를 하는 히카리가 옆에 있다.


▲ 딱히 뇌내망상 없이도 그녀는 내 앞에 존재했다 (사진출처: 게임메카 촬영)

그런 히카리는 간혹 들떠서 내게 뭔가를 묻거나, 내 물음에 답을 한다. 행복감에 젖어 있다가 살짝 일어나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앙증맞은 정수리와 고운 목선이 보인다. 살짝 뒷편으로 가 보면 티끌 하나 없이 깔끔한 교복에서 햇빛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뒤로 질끈 묶어 찰랑대는 포니테일 머리는 고개를 돌릴 때마다 찰랑거리며 좋은 샴푸향을 풍기는 느낌이다. 길지 않은 VR의 역사에서, 캐릭터 하나에 이토록 공을 들인 게임은 단언컨대 없었다.

게임 진행 방식도 훌륭하다. PS 무브나 듀얼 쇼크 등의 컨트롤러는 극히 일부 장면을 제외하면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히카리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저으면 Yes/No를 대답할 수 있고, 객관식 형 질문에는 화면에 표시되는 선택지에 시선을 맞추면 된다. 히카리가 먹여 주는 케잌을 받아 먹을 때는 자연스럽게 얼굴을 갖다 대면 어느새 입 안에 단 맛이 고이는 느낌이 날 정도다. ‘서머 레슨’처럼 뭔가를 조작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않으면서도 진행할 수 있는 직관적인 게임은 VR에서도 거의 없다.

‘서머 레슨’의 가장 큰 장점은 현실에서라면 같이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송구스러울 정도의 미소녀와 뭔가를 한다는 것 그 자체다. 서로 잡담을 주고받고(비록 나는 대답하거나 주제 선택만 하지만), 카페에 가서 학교 축제(메이드 카페) 연습을 하고, 체력단련을 하고, 불꽃놀이를 같이 보러 가고… 그야말로 파라다이스가 따로 없다. 그 와중에 슬쩍슬쩍 ‘썸’ 기운이 느껴지는 발언까지 듣다 보면 정신이 황홀해질 지경이다.




▲ 컨트롤러 따윈 필요 없게 만드는 고개 조작법 (사진출처: 게임메카 촬영)


▲ 케잌을 먹으려면 버튼을 누르지 말고 실제로 '먹으면' 된다 (사진출처: 게임메카 촬영)

2주차 이상, 지루하다…

여자친구가 있건 없건, 기혼자건 미혼자건, ‘서머 레슨’을 시작하면 누구든 히카리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분은 1주차 플레이가 끝나는 불과 30~40여분 만에 지루함으로 바뀐다.

‘서머 레슨’의 본질은 히카리와 소통하는 것이다. 물론 다른 게임성이 없지는 않다. 그녀의 성장을 고려해 수업 내용을 선택한다던가, 스탯을 올리기 위해 노력하는 등 나름의 육성 요소는 있다. 수업 결과가 좋거나 특정 조건에서 일어나는 추가 이벤트를 공략하는 재미도 있다. 그러나 이는 그저 형식일 뿐, 본질적인 재미는 히카리와 보내는 풋풋한 일상 생활에서 느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서머 레슨’의 콘텐츠는 빈약하기 짝이 없다. 첫 일주일 간의 생활을 다루는 초반 3~40분을 넘기고 나면, 나머지는 반복의 연속이다. 히카리는 늘 똑같은 패턴으로 움직이고, 묻고, 답한다. 이전에 Yes였던 답변을 No라고 한다 해도 대꾸가 살짝 달라질 뿐 눈에 띄는 극적인 변화는 없다. 대화도 20~30초를 넘기는 게 거의 없다. 그마저도 선택지가 많지 않아 나중에는 엔딩을 위해 같은 장면을 반복해 봐야 한다. 한마디로 콘텐츠의 양이 지나치게 적다.

7일이라는 시간 안에 다양한 감정을 담아내려다 보니 개연적으로 억지스러운 부분도 찾아볼 수 있다. 만난 지 고작 이틀 째인 과외 선생님에게 히카리는 ‘학교 수업보다 선생님의 수업이 재미있어요’, ‘이제 만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이상한 기분이네요’ 등의 의미심장한 발언을 한다. ‘금사빠(금세 사랑에 빠지는)’인 사춘기 여자아이의 발언이라고 치부하기에도 진도가 너무 빠르다. 설마 플레이어는 강동원급 외모나 여왕벌급 페로몬의 소유자인 것일까?

▲ 붙임성이 좋은건지, 내게 첫 눈에 반한건지... 마음을 여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사진제공: 반다이남코)

정발판에 기본 포함돼 있는 각종 DLC 콘텐츠들이 이를 보완하긴 했지만, 그마저도 5분짜리 시간 때우기일 뿐이다. 특히 불꽃놀이의 경우 약 2~3분 동안 흐릿한 불꽃을 보며 앉아 있어야 하는데, 그 동안은 할 수 있는 게 딱히 없다. 히카리 쪽을 보고 있으면 ‘절 보지 말고 불꽃을 보라구요’라는 대꾸 정도나 들을 수 있을까. 이런 모든 과정은 1~2회차 때나 재밌지, 나중에는 그저 색만 다른 옷을 입고 같은 행동을 하는 히카리를 멍하니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히카리에게서 인간미를 상실한 순간은, 원래 있어야 할 위치를 조금 이탈했더니 히카리가 그저 정해진 행동만 취하는 마네킹이 된 것을 봤을 때였다. 일정 범위 내에서는 내게 시선을 맞춰 주는 히카리지만, 조금만 벗어나면 플레이어가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시선을 고정한 채 정해진 대사를 읊는다. 나와는 상관없이 한 곳만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보자 눈 앞에 있는 여자애는 게임 캐릭터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짙게 들어 살짝 슬퍼졌다.


▲ 가상의 나를 향해 정해진 대사를 읊는 히카리 (사진출처: 게임메카 촬영)


▲ 길기만 한 불꽃놀이 이벤트는 반복 플레이를 지루하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다 (사진출처: 게임메카 촬영)

일단 이런 기분이 들기 시작하면, 게임의 재미는 반감, 아니 대폭 감소한다. 뒤에서 별 짓을 다 하고 있어도 앞만 바라보는 캐릭터를 보고 있으면, 내가 마치 투명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는 연애 게임으로 전례없는 대성공을 거둔 ‘러브 플러스’와 정반대다. ‘러브 플러스’는 당시 기준으로도 구시대적인 3D 그래픽으로 구현된 게임이었지만, 실제로 여성과 연애를 하는 느낌을 주는 데 성공했다. 매일같이 여주인공과 나누는 다양한 대사와 이벤트, 일러스트는 현실 시간으로 2년 여에 걸친 방대한 양을 자랑해 유저로 하여금 질릴 틈을 주지 않았고, 쌓여 가는 추억 속에 ‘그녀는 나만의 연인’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한편 ‘서머 레슨’의 히카리는 주어진 임무만 성실히 수행하는 역할극의 캐릭터라는 느낌이 강하다. 이러다가 ‘시간 다 되었습니다. 연장하시겠습니까?’ 라는 말이 나올 것만 같아 불안할 정도다. 결혼식까지 이어진 ‘러브 플러스’와는 달리, SNS 상에서의 미야모토 히카리를 향한 ‘여친선언’이 초반에 반짝 그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다.


▲ 어째 만년 연인으로 삼기엔 마음이 쉽게 가지 않는다 (사진출처: 게임메카 촬영)

30분짜리 연인, 그러나 가능성은 봤다

풋풋한 썸 시뮬레이션을 기대했다가 히카리 관찰로 끝나버린 ‘서머 레슨’이지만, 적어도 퀄리티 하나만큼은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공포 장르와 함께 VR의 장점을 가장 잘 이끌어낸 게임이 아닐까 생각된다. VR에서 느끼는 연애 감정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선사했다는 점만으로도 이 게임은 높이 평가받을 가치가 충분하다.

다만, 지나치게 얄팍한 콘텐츠는 한시바삐 뜯어고쳐야 할 문제다. 오픈 월드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게임의 무대가 좀 더 넓었으면 하고, 커뮤니케이션 패턴의 깊이와 양을 최소한 지금의 10배는 늘려야 한다. 짜여지지 않은 돌발적인 상황에도 대처할 수 있도록 하고, 대화도 좀 더 다양한 주제로 길게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아, 그러려면 ‘레슨’ 시간만으로는 부족하려나?

어쩌면 이 모든 단점은 VR에 너무 심취하지 말라는 하라다 PD의 배려일 지도 모른다. 아마 당분간은 ‘서머 레슨’을 다시 틀지는 않을 것 같지만, 차기작이 나오면 반드시 해 볼 예정이다.


▲ 다른 장소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만날 수 있기를! (사진제공: 반다이남코)
류종화
게임메카의 모바일게임, 온라인게임, VR게임 분야 담당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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