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기사 > 전체

20년 지기 소프트맥스를 보내며...

/ 4

▲ 소프트맥스 CI (사진제공: 소프트맥스)


한국 게임산업의 태동부터 함께 해 오던 소프트맥스가 사라졌다. 회사가 매각됐고, 이름이 바뀌었다. 아직 게임사업을 아예 접은 것은 아니지만 사명 변경 후 ‘창세기전 4’ 개발진에 대한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이후 행보도 넥스트플로어와의 ‘창세기전’ IP 계약과 ‘주사위의 잔영 모바일’ 퍼블리싱 계약 외에는 없다.

다시 말해 소프트맥스는 우리가 아는 ‘게임 개발사’로서의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다. 현재 서비스/개발 중인 ‘창세기전 4’와 ‘주사위의 잔영 모바일’을 끝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소프트맥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셈이다.

나름 한국 게임산업과 함께 성장해온 한 명의 게이머로서, 소프트맥스라는 이름은 유난히 각별하다. 디스켓 시절부터 CD 패키지를 거쳐 온라인과 모바일 시대를 함께 한, 그야말로 20년 지기에 가까운 존재다. 국내 게임산업에 여러 획을 그은 소프트맥스를 추모하며, 간략한 역사와 그에 얽힌 추억을 되새겨본다.

국내 게임시장의 태동을 이끈 회사

일반적으로 소프트맥스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계기는 1996년 발매된 ‘창세기전 2’일 것이다. 필자 역시 ‘창세기전 2’를 통해 소프트맥스라는 회사에 대해 알게 됐고, 20년에 걸친 팬질(?)을 시작했다. 간혹 그 전에 3.5인치 디스켓 10장 분량으로 나온 ‘창세기전 1’때부터 소프트맥스를 알아 왔다는 분들도 계신데,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그러나 소프트맥스의 역사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조금 더 일찍 시작됐다. 소프트맥스의 전신은 ‘창세기전’의 아버지라 불리는 최연규 이사와 조영기 전무, 전석환 아트 디렉터 등이 뭉쳐 아마추어 게임을 만들던 게임제작 동호회다. 당시 김학규 현 IMC게임즈 대표의 본가 지하실에 우글우글 모여 게임을 만들던 이들은 김학규 대표의 군입대로 인해 게임을 개발할 장소를 잃게 됐고, MD게임 납품 회사 갑인물산에 근무하던 정영원 소프트맥스 전 사장이 이들에게 조그마한 작업실을 마련해 주면서 어느 정도 틀이 잡히게 된다. 1994년 초, 갑인물산이 도산하면서 정영원 대표는 게임 개발자들을 모아 회사를 설립하는데, 이것이 소프트맥스의 시작이다.

소프트맥스의 초기 작품은 ‘학규굴’ 시절부터 개발해 오던 액션 게임 ‘리크니스’, 슈팅 게임 ‘스카이 앤 리카’ 등이었다. 국산 게임이 희귀하던 시절이었고, PC 패키지 게임 시장 인프라도 자리잡기 전이라 큰 흥행을 기록하진 못했지만 국산 게임 산업의 가능성은 어느 정도 맛본 셈이다.

그러던 중 이원술을 필두로 한 손노리 팀이 공개한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데모에 자극을 받아 개발한 ‘창세기전 1’이 게임인들 사이에서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는 한국 게임산업의 태동기로, 국내 게임 개발사들은 기술과 자본력의 한계로 인해 가벼운 액션 게임을 주로 개발해왔다. ‘영웅전설’, ‘이스’, ‘드래곤 퀘스트’, ‘파이널 판타지’ 같은 RPG에 도전한 개발사는 많지 않았다. 그 와중 출시된 ‘창세기전 1’은 동시대 출시된 손노리의 ‘어스토니시아스토리’와 함께 한국에서도 소위 ‘대작’이라 불리는 게임이 탄생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줬다.



▲ 국내 RPG의 가능성과 흥행을 입증한 ‘창세기전 2’ 공식 포스터

1년 후 출시된 ‘창세기전 2’는 전작을 뛰어넘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저장 매체를 플로피 디스크에서 CD-ROM으로 바꾸며 보급률이 전작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늘었기 때문이다. 게임 선진국인 미국이나 일본 작품들과 비교해 봐도 스토리, 분량, 그래픽, 연출, 일러스트 등 무엇 하나 뒤쳐지지 않았다. 아마 필자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이 때 소프트맥스라는 이름을 처음 접했을 것이다.

‘창세기전 2’를 통해 소프트맥스는 명실공히 국내 최고의 게임 개발사 중 하나가 되었다. 현재는 많이 퇴색됐지만, 이 때 국내 게임업계에 생긴 ‘RPG를 잘 만드는 회사가 최고의 게임 개발사’ 라는 불문율은 아직까지도 통용되고 있다.

창세기전 시리즈로 게임업계 최정상에 서다

‘창세기전 2’로 국내 탑 개발사 중 하나가 된 소프트맥스는 액션 RPG ‘에임포인트’, RTS ‘판타랏사’ 등 다양한 장르에 도전했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이로 인해 경영 위기가 찾아오며 본래 2편으로 완결했던  ‘창세기전’ 시리즈에 재시동이 걸렸고,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창세기전 외전: 서풍의 광시곡’이다.

개인적으로 ‘서풍의 광시곡’은 애증의 게임이다. 당시 몇 푼 안되던 용돈을 모아 게임샵에 간 필자는 비슷한 시기 발매된 손노리의 ‘포가튼 사가’와 ‘서풍의 광시곡’을 놓고 엄청난 갈등을 했다. 결국 당시 선택은 기나긴 발매 연기 끝에 출시되며 조금 더 기대감을 자극한 ‘포가튼 사가’였지만, 버그 투성이였던 게임성에 실망해 ‘서풍의 광시곡’을 선택할 걸 후회하며 깊은 좌절에 빠졌던 기억이 난다.


▲ 추후 3개국에 발매된 ‘창세기전 외전: 서풍의 광시곡

‘서풍의 광시곡’은 ‘창세기전’ 시리즈의 뒤를 잇는 작품답게 흥행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IMF가 닥치며 유통사 하이콤이 부도를 맞이하는 바람에 소프트맥스는 판매 수익을 모두 회수하지 못했다. 결국 궁여지책으로 만들어 낸 게임이 당시 전혀 다른 프로젝트로 개발 중이던 ‘창세기전 외전 2: 템페스트’였다.

‘템페스트’는 게임성 면에서는 극과 극의 평가를 받지만 어쨌든 많은 관심을 받으며 또 한 번 ‘창세기전’ 시리즈의 가치를 증명했다. 일본 일러스트레이터 Tony의 미려한 캐릭터 덕에 여성 팬도 급격히 유입됐으며, 국내 최고 일러스트레이터 중 한 명인 김형태 역시 이 게임 후반부 작업을 통해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창세기전’ 시리즈의 연이은 성공에 고무된 소프트맥스는 외전이 아닌 정식 시리즈를 기획, 출시했다. ‘창세기전 3’는 안타리아를 배경으로 한 파트 1과 아르케에서 진행되는 파트 2로 나뉘어 출시됐고, 국내 최고 수준의 흥행을 거둠과 동시에 대한민국 게임대상까지 수상했다.


▲ 소프트맥스의 전성기를 장식했던 ‘창세기전 3’ 공식 포스터

‘서풍의 광시곡’부터 ‘창세기전 3: 파트2’까지, 당시 소프트맥스에 쏠린 관심은 단연 국내 최대 수준이었다. 오죽하면 캐릭터 원화 한 장 한 장이 공개될 때마다 게임잡지들이 특집으로 분석 보도할 정도였으며, 국내 개발사들이 ‘창세기전’ 시리즈 발매 타이밍이 잡힌 연말에 게임 출시를 피할 정도였다. 여기에 규모는 작았지만, 블리자드 등 초대형 개발사나 주최할 법한 유저 초청 행사 및 게임 관련 상품 출시 등도 진행했다. 당시 소프트맥스에 대항할 만한 게임은 블리자드의 ‘스타크래프트’ 정도였으니, 국내 No.1 개발사로서 모자람이 없었다.

온라인게임 진출도 이 때 이뤄졌다. ‘창세기전 3: 파트 2’의 부록으로 들어 있던 배틀넷 스타일의 대전 게임 ‘창세기전: 아레나’와 아예 별도의 클라이언트로 구성된 ‘4LEAF’가 바로 그것. 이 중 ‘4LEAF’는 ‘주사위의 잔영’으로 대표되는 게임과 ‘룬의 아이들’을 채용한 캐릭터와 커뮤니티성으로 높은 인기를 모았다. 부분유료화 모델이 일반화되기 전이라 수익성은 거의 없었지만, 이대로라면 온라인게임에서도 소프트맥스가 활약할 수 있으리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많은 코어 유저들이 ‘4LEAF’를 즐겼다.


▲ '4LEAT'는 현재 소프트맥스가 개발 중인 '주사위의 잔영'의 모태가 됐다
(사진제공: 소프트맥스)

변한 시대에 발 맞추지 못하다

‘창세기전 3: 파트 2’를 정점으로, 소프트맥스는 몇 차례의 오판과 실패를 반복하며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창세기전’ 시리즈를 대신해 내세운 새 대작 RPG ‘마그나카르타’가 그 시작이었다.

‘마그나카르타’가 출시된 2001년 당시는 번들 CD 제공 난립에 이어 인터넷과 와레즈의 보급으로 국내 PC 패키지 게임 시장이 저물어가고 온라인게임이 서서히 주류로 올라서던 시기로, 국내 최고의 개발사로 불리던 소프트맥스 정도만이 최후의 보루로 여겨지던 판국이었다. 그러나 ‘마그나카르타’는 게임 진행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의 심한 버그와 미완성된 게임성으로 국산 게임 초유의 불매 운동 및 리콜 사태까지 맞이했다. 당시 ‘마그나카르타’ 리콜 사태는 단순한 게임 하나의 흥행 실패를 넘어서, 꺼져가던 국산 PC 패키지 시장의 종말을 가져왔다.


▲ 사상 초유의 리콜 사태를 일으켰던 '마그나카르타' 공식 포스터

이어 소프트맥스는 2003년, 클라이언트에서 실행되던 ‘4LEAF’를 웹으로 이전하고 게임 가짓수를 대폭 늘려 거대 차세대를 선도할 게임 포털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주사위의 잔영’이나 채팅방 등 주요 시스템이 대폭 삭제됐고, 이를 대신해 출시된 ‘젤리삐워즈’ 등의 콘텐츠들이 유저 기대에 못 미치면서 ‘4LEAF’ 역시 몰락의 길을 걸었다. 당시 ‘4LEAF’를 즐기던 한 사람의 유저로서, 클라이언트를 유지한 채 부분유료화 모델만 성공적으로 도입했다면 소프트맥스도 유명 온라인게임 개발사 중 하나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창세기전’으로 쌓아 올린 소프트맥스의 이미지는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기나긴 암흑기가 찾아왔고, 차기작 소식도 한동안 들리지 않았다. ‘룬의 아이들’ IP로 야심차게 개발한 ‘테일즈위버’는 재정난으로 IP를 넥슨에 20년(10년+10년) 장기 대여 형태로 넘겼다. 몇 년 동안 개발해 콘솔로 출시한 ‘마그나카르타 2’는 전작과는 달리 안정적인 게임성을 자랑하며 게임대상을 한 번 더 수상하고 해외 수출까지 이뤄졌지만, 패키지 게임 한 개의 흥행으로 버티기에는 이미 온라인게임을 중심으로 한 국내 게임시장의 규모가 너무 커져 있었다.

2000년대 후반 들어, 더 이상 소프트맥스는 국내 게임산업을 최전선에서 이끌던 회사가 아니었다. 예전처럼 게임을 자주 출시한 것도 아니어서, 게임 매체에서도 동향을 쉽게 접하기 어려워졌다. 회사의 수입원은 2007년 출시돼 약 8년 간 서비스된 ‘SD건담 캡슐파이터’ 하나만이 거의 유일했다.

여담으로, ‘SD건담 캡슐파이터’는 소프트맥스 10주년 기념 유저 간담회에서 처음 발표되었는데, 새로운 ‘G 시리즈’가 공개된다는 소문이 돌며 ‘창세기전(The War of Genesis)’ 시리즈가 부활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기대했다가 ‘건담(GUNDAM)’의 G라는 것을 듣고 깊이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그랬던 ‘SD건담 캡슐파이터’가 10년 가까이 소프트맥스를 먹여 살릴 캐시카우가 될 줄이야...


▲ 그러했던 'SD건담 캡슐파이터'도 작년에 서비스가 종료됐다 (사진출처: 공식 홈페이지)

이후 소프트맥스는 Xbox Live로 출시한 ‘던전앤파이터’ 콘솔판이나 모바일게임 ‘아이엔젤’, ‘트레인크래셔’ 등으로 새로운 성장 모멘텀을 찾아 헤맸지만, 잇따라 흥행에 실패했다. 2016년 3월에는 회사의 명운을 걸고 6년간 개발한 MMORPG ‘창세기전 4’가 출격했지만, 이미 MMORPG의 전성기는 훌쩍 지난 상태였다. ‘마그나카르타 2’ 이후 출시된 작품들이 잇따라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기록하면서, 소프트맥스의 적자 행진에 결국 빨간불이 켜졌다.


▲ 야심차게 출시됐으나 시장 안착에 실패한 ‘창세기전 4’ (사진제공: 소프트맥스)

마침내 2016년 9월, 소프트맥스 최대주주가 정영원 대표에서 이에스에이제2투자조합으로 바뀌고 10월에는 회사명까지 이에스에이로 바꿨다. 새 경영진은 사업 분야를 엔터테인먼트로 확장시킬 뿐 게임 사업에서 손을 떼는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후 소프트맥스는 점점 게임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창세기전 4’ 개발진 구조조정에 이어 지난 24일에는 넥스트플로어와 ‘창세기전’ IP 계약을 맺고, 자사가 개발 중이던 ‘주사위의 잔영’ 글로벌 판권까지 넘기며 본업이라 할 수 있었던 게임사업 영역이 차츰 사라지고 있다.

현재 소프트맥스(현 이에스에이)에 남은 것은 모바일로 개발 중인 ‘주사위의 잔영’ 하나뿐이다. ‘창세기전 4’ 개발진은 대량 정리됐고, 신규 프로젝트도 마땅히 보이지 않는 상태다. 문득 책꽂이에 꽂혀 있는 ‘창세기전 3: 파트2’ 패키지와 김형태 AD의 싸인이 담긴 아트북이 눈에 들어온다. 오늘은 내 게임인생 20년지기 소프트맥스를 추모하며 소맥 한 잔 기울여야겠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공유해 주세요
게임잡지
2005년 3월호
2005년 2월호
2004년 12월호
2004년 11월호
2004년 10월호
게임일정
2024
04